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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보] 6·25 그 후…또다른 삶의 '전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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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방 한칸짜리 오두막과 판잣집 수천개가 헐벗은 산허리에 버섯처럼 솟아 있었다. 천막촌도 거의 하룻밤 사이에 한개씩 만들어졌다. 집들은 역학의 법칙을 무시하고 있었다. 바람이 불면 날아갈 것 같았다."

한국전쟁이 끝난 지 4년 뒤인 1957년 12월.

미국신부 알로이시오 슈월츠(한국명 소재건.1930~1992.사진(中))에게 부산은 상처투성이의 모습으로 다가섰다. 49년 부산의 인구는 47만. 전쟁이 터지면서 피란민이 몰려들어 51년에는 84만, 57년에는 102만명으로 늘어났다. 돌아갈 고향도, 먹고살 땅 한평 없는 피란민들은 산비탈에 눌러앉았다. 거리는 부랑아와 전쟁고아들로 넘쳐났다. 신부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묘사했다.

"세 소년이 얇은 담요 한장을 덮고 강아지처럼 엉켜 자고 있었다. 담요 밖으로 삐져나온 발은 동상에 걸려 있었다. 다리가 없는 불구자는 궁둥이를 땅에 깔고 곡예 하듯 길을 건너고 있었다. 한 여자가 통증으로 배를 움켜 잡고 쓰러졌다. 당황한 세 아이가 하릴없이 엄마의 치마를 붙잡았다."

이렇다 할 고아 수용시설이 없던 시절이었다. 앵벌이, 넝마주이, 구두닦이, 껌팔이… 고아들은 그렇게 거리를 떠돌다 수용소에 붙잡혀왔다. 이름이 붙여지고 생일과 나이가 정해졌다. 당시 악질 자선사업가들은 정부의 보조금을 노리고 곳곳에 수용소를 만들었다.

이모(53.울산)씨 는 당시 수용소 생활을 '생지옥'이라고 표현했다.

"영화숙이라는 곳이었어요. 한줌도 안되는 멀건 수제비와 강냉이 죽만 먹었죠. 배가 고파 쓰레기통을 뒤져 닥치는 대로 먹었습니다. 심지어 '쫀드기(고운 흙)'를 파먹고 변을 못 봐 고생하기도 했습니다. 탈출했다 다시 잡혀왔을 때는 상상못할 구타가 가해졌습니다. 마룻바닥의 판자를 뜯어내 때렸어요. 귀가 찢어지자 진흙을 발랐습니다"

탈출과 감금의 악순환이 되풀이됐다. 탈출한 아이들은 다시 넝마주이에게 잡혀가기도 했다. 이들은 몸집보다 큰 걸망을 지고 도시의 뒷골목을 헤맸다. '넝마주이 대장'은 교묘하게 어린 아이들을 착취했다. 수용소로 보내겠다고 협박하며 번 돈을 갈취했다. 전쟁고아들은 절망뿐인 도시에서 분노의 응어리를 키우며 잡초처럼 세상을 헤쳐나가야 했다.

소 알로이시오 신부는 전쟁고아와 빈민들을 위해 헌신할 결심을 하게 된다. 59년 워싱턴에서 '한국자선회'를 설립해 기금마련에 나섰다. 62년 다시 부산으로 돌아온 그는 '마리아수녀회'(2004년 호암상 수상)를 설립하고 '부산 소년의 집'(1970)의 전신인 '송도가정'(1964)을 열어 고아를 돌보기 시작했다. 이어 필리핀 마닐라(1986), 멕시코 찰코시 소년의 집(1991)을 지어 버려진 아이들을 위해 몸을 바쳤다.

사진제공=마리아수녀회
글=박종근 기자


"한국 어린이에게 도움을"
"도와주세요. 전쟁으로 고통 받는 아이들입니다." 알로이시오 신부는 소년의 집 운영기금을 마련하기위해 엽서를 만들어 미국의 독지가들에게 보냈다.


거리를 헤매는 아이들 중에는 혼혈아도 눈에 띄었다. 이들은 같은 처지의 고아들 사이에서도 멸시와 따돌림을 당해야 했다.


목마른 양동이 행렬
전기도 수도도 없었다. 비를 피하고 몸을 누일 곳이 있는 것만도 다행이었다. 하루 두번 오는 급수차를 기다리는 양동이가 부산 아미동 난민촌 언덕에 길게 줄지어 있다.


고아 수용소
고향도 이름도 나이도 모른다. 머릿속은 하얗게 백지가 돼버렸다. 폭행과 감금, 굶주림에 시달린 아이들의 눈빛은 세상에 대한 분노로 가득 차 있는 듯하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갈 곳 없는 피란민들은 부산에 그대로 눌러앉았다. 1960년대 초반에 촬영된 아미동 산자락의 난민촌 전경.


하루종일 구걸을 하고 쓰레기통을 뒤지지만 끼니를 거르는 날이 더 많았다. 열살이 채 안돼 보이는 고아들이 군용 반합에 구걸해 온 음식물을 끓이고 있다.


'엄마'수녀님
'소년의 집' 전신인 '송도가정'에 입양돼 잠든 아이들. 이곳은 '엄마'수녀와 아이들이 함께 살도록 가족단위로 운영됐다. 수용소에서 굶주림과 학대에 시달리던 고아들은 여기서 난생 처음으로 사랑이라는 것을 맛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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