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조원짜리 분쟁까지 해결, 대기업 경영권도 쥐락펴락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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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호 11면

한화, 대생 땐 중재 대우조선은 소송
한화그룹은 2006년 7월 국제상업회의소(ICC) 산하 국제중재법원(ICA)에 제소됐다. 예금보험공사가 ‘예보와 한화그룹 간 대한생명 주식 매매계약의 무효 중재’ 신청을 냈던 것이다. 분쟁금액 5조원대인 초대형 사건의 중재 장소는 뉴욕으로 정해졌다. 예보는 법무법인 태평양의 중재팀과 영국계 로펌이, 한화는 김&장 법률사무소와 미국계 로펌이 대리했다. 당시 중재 비용으로만 예보가 90억원, 한화가 300억원가량을 썼다고 한다. 2년여의 치열한 공방은 지난해 11월 ICC 중재법원의 판정으로 종결됐다. 한화그룹의 승리였다.

소송보다 빠른 문제 해결, 비즈니스 중재의 세계

그 중재 판정이 내려지기 한 달 전, 한화는 대우조선해양 인수의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됐다. 이후 매각 주관사인 산업은행에 3150억원의 이행보증금을 납부했다. 자금 부족으로 매각 협상이 결렬되면서 이행보증금 전액을 떼일 처지에 놓였다. 한화 측은 조만간 법원에 반환소송을 제기할 계획이다.

대한생명 매각 사건 때 중재재판에서 승리한 한화가 대우조선해양 매각 사건은 소송으로 가져갈 수밖에 없는 이유는 뭘까. 애초 협상 때 ‘분쟁 발생 시 중재로 해결한다’는 당사자 간 합의 조항을 넣지 않았기 때문이다. 원인은 간단하지만 결과와 파장은 예측불허다. 법무법인 태평양의 중재팀장인 김갑유 변호사는 “대한생명 사건은 외국계 회사가 끼어 있어 중재 조항을 넣었으나 대우조선해양 사건은 국내 당사자들 간 다툼이라 이게 빠진 것 같다”고 분석했다. 법원 소송에서는 중간 금액의 합의가 이뤄지기 어렵다. 한화는 ‘All or Nothing’ 게임의 주사위를 던진 것이다.

현대중공업을 비롯한 계열사들이 지난해 3월부터 아랍에미리트 아부다비 정부 소유 투자회사인 IPIC를 상대로 진행 중인 국제중재 사건의 분쟁 금액도 5조원대에 이른다. 현대오일뱅크의 주식 매입 문제를 놓고 IPIC와 현대계열사가 서로 주주 간 계약을 위반했다고 주장하는 사건이다. 올해 말께 결론이 나면 이기는 쪽이 회사 주식 전체를 보유하게 된다.

대형 국제중재 사건은 쟁점이 많고 전문성이 요구돼 마지막 결정까지 2년 이상 걸리기도 한다. 워낙 분쟁 금액이 큰 만큼 세계적인 로펌들도 중재에 눈독을 들인다.
‘국제중재는 서류와의 싸움’이란 얘기도 있다. 전자통신연구원이 1998년 미국 통신회사인 퀄컴을 상대로 낸 휴대전화 기술(CDMA) 관련 로열티 분쟁에선 휴대전화의 기술적 문제와 관련해 라면 박스 40개 분량의 증거 서류가 제출됐다. 중재는 단심제라 한 번 지면 끝이다. 중재인의 결정은 법원의 확정 판결과 동일한 효력을 갖는다. 연구원 측 대리인은 불과 7~10일간의 심리 기간에 그 서류를 다 보고 전략을 세워 재판에 임했다고 한다.

아시아 시장 주름잡는 한국 로펌들
한국 중재시장의 규모는 연간 1000억원대로 추산된다. 국제중재 500억원, 국내중재 500억원가량이다.전문 중재팀이 별도로 있는 법무법인 태평양과 판사 출신 중재 전문가가 포진한 김&장 법률사무소가 양분하고 있다. 세종·광장·화우·율촌 등이 그 뒤를 쫓고 있다. 남북 간 상거래 분쟁을 해결하기 위한 기구도 있다. 2003년 남북 간 합의로 남북경제교류 상사분쟁위원회가 설립됐다. 아직까지 중재 신청이 들어온 건 없다

민간 기구로 한국의 중재재판소 격인 대한상사중재원(KCAB) 지능전략팀 안재철 과장은 “국내 중재시장은 세계 10위권에 든다”며 “아시아에서는 최고 수준으로 중국·일본보다 앞서 있다”고 말했다. 국내 기업들이 가장 많이 이용하는 중재법원은 프랑스 파리의 ICC 중재법원. 2007년 국내 기업들은 59건의 국제중재 사건 중 40건을 ICC에 제소했다. 당시 일본은 20건, 중국은 27건에 그쳤다.

국제중재 시장 규모도 계속 커지고 있다. 투자자의 해당 국가를 상대로 한 분쟁(ISD)이나 양자 간 투자협정(BIT), 국가 간 자유무역협정(FTA) 등과 관련해 발생하는 국가와 기업 또는 개인 간의 투자 분쟁도 중재를 통해 해결하려는 움직임이 있기 때문이다.

일부 국가는 국제중재 재판을 자국의 관광산업과 연결하기도 한다. 중재재판의 심리가 열릴 때마다 중재인, 로펌 변호사, 증인 등 수십 명이 호텔에 묵으며 돈을 많이 쓰고 가기 때문이다. 강대국에 둘러싸여 지정학적 조건이 좋은 서울을 국제중재의 허브로 만들기 위해서는 국가 차원의 지원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불황 때 더 활발, 지난해보다 44% 늘어
과거 외환위기에 이어 최근 경제위기가 다시 닥치면서 중재 사건이 가파르게 늘고 있다. 올 1~2월 대한상사중재원에 접수된 중재 사건은 52건 1800만 달러였다. 이는 지난해 1~2월 36건 1400만 달러에서 건수로는 44%, 금액으로는 22% 늘었다. 중재 건수도 2006년 215건, 2007년 233건, 2008년 262건으로 증가하는 추세다.

『국제중재 가이드 핸드북』을 펴낸 권태욱 변호사는 “불경기 때는 계약 취소로 인해 위약금을 내놓으라는 소송 등 상거래 분쟁이 늘어난다”고 설명했다.
일부 전문가는 연예인이나 스포츠 스타와 소속사 간의 계약 분쟁, 가족 구성원 간 재산 분할 분쟁 등을 중재재판의 블루오션으로 꼽는다.

중재를 통하면 대법원 판결까지 받아 봐야 하는 소송보다 단기간에 분쟁을 끝낼 수 있고 사생활 보호와 비밀 유지가 된다는 점을 활용하자는 것이다. 당사자 간 합의를 통해 중재인, 중재 장소를 마음대로 정할 수 있는 것도 중재의 장점이다. 이래서 법원도 중재의 장점을 일부 채택해 재판을 신속하게 하는 등 새 트렌드로 삼을 필요가 있다는 주장도 나온다. 김갑유 변호사는 “중동의 두바이특별지구처럼 전 세계의 저명인사들을 재판관으로 위촉해 일이 생기면 참여케 하는 방식을 도입하는 것을 검토할 때가 됐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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