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8기 왕위전 본선 리그' 화초바둑은 싫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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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9면

제38기 왕위전 본선 리그
[제3보 (35~54)]
黑.조한승 7단 白.안조영 8단

바둑판의 사각 반듯한 길은 숨이 막힐 듯 질서정연하다. 하지만 그 길을 가만히 바라보노라면 창칼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온다. 욕망의 불길이 타오르고 사람들의 아우성과 함께 바람결에 언뜻 피냄새가 스쳐지나간다.

35로 걸치며 조한승7단은 '참고도'흑1의 지킴수를 머리에 떠올린다. 양날개를 펼친 우상 흑진영을 입체화시키며 집으로 굳히는 수. 크기만 따진다면 이 수가 더 클지 모른다. 그러나 프로라면 누구나 '참고도'흑1보다는 실전의 35를 선택하게 된다. 왜일까.

'참고도'는 법도가 있다. 전통적인 이론에 따라 쌍방 완벽하게 모양을 구축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흐름은 어딘지 '화초' 냄새가 난다. 아름답기는 하지만 생존을 위한 치열한 몸싸움이 없는 온실 속의 화초 말이다.

36, 38이 안조영 특유의 임기응변이다. 36은 책에는 없는 수다. 프로들이 강의할 때 '이적수의 표본'으로 꼽는 수다. 따라서 고수의 체모를 지킨다면 A나 B, 어딘가를 협공해야 한다. 하지만 그러다가 후수라도 잡으면 어쩌나. 安8단은 우상마저 빼앗길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이런 배경을 안고 등장한 36과 38은 말하자면 체면불구하고 선수를 잡겠다는 수다. 실전적인 한국류의 사고법을 진하게 느낄 수 있다. 安8단은 39가 필연일 때 소원대로 선수를 잡아 우상으로 직행했고 일단 이곳의 실리를 파헤치는 데 성공했다.

박치문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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