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코너]공소시효없는 역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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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모리스 파퐁. 87세. 연금생활자. " 주심인 장 루이 카스타녜드 판사의 요구에 따라 자신의 신분을 밝히는 노인의 목소리는 가볍게 떨리고 있었다.

난생 처음으로 교도소 감방에서 밤을 지내며 3시간밖에 잠을 못 이룬 탓일까. 25㎜ 두께의 방탄유리가 둘러쳐진 피고석에 앉아 판사의 질문에 대답하는 그는 힘들고 피곤한 모습이었다.

파리 경찰청장과 하원의원, 예산장관을 거치며 프랑스를 위해 봉사했다는 평소의 자부심과 기개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2차대전 당시 나치에 협력, 1천5백60명의 유대인을 수용소로 강제송환한 혐의로 53년 만에 기소된 파퐁에 대한 '반인륜죄' 재판이 시작된 8일. 프랑스 사람들의 눈과 귀는 온통 보르도 중죄법원으로 쏠렸다.

고소인 35명. 고소단체 15개. 고소인과 피고인측 변호인 28명. 양측이 신청한 증인 1백28명. 공판서류 40권 2만쪽…. 지난 81년 고소된 이후 무려 16년을 끌어온 끝에 결국 검버섯이 핀 노인을 법의 심판대에 세운 역사적 재판은 첫날부터 원고와 피고측 변호인간의 뜨거운 설전장이었다.

나이와 지병인 심장병을 이유로 피고측 변호인은 공판기간중 불구속 재판을 요청했고 원고측은 사안의 중대성과 소송법 규정을 들어 이의를 제기했다.

첫날 공방은 공소시효조차 없는 반인륜죄로 파퐁을 처단하는 것이 마땅한지, 시대와 상황의 희생양에 불과했다는 그의 주장을 받아들일지를 놓고 앞으로 전개될 본격적인 설전을 예고했다.

프랑스 국민의 72%는 반세기가 지난 지금이라도 나치의 유대인 학살에 협력했던 인사들에 대한 재판은 필요하며 또 71%는 대독 (對獨) 협력정권이었던 비시정권이 유대인 학살에 협력했던 과거에 대해 프랑스가 책임을 져야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렉스프레스지 여론조사) . 비시정권 당시 공직자로 나치의 유대인 학살에 협력했던 프랑스 사람은 파퐁 말고도 많다.

대부분은 죽었지만 아직도 그늘에 묻혀 지내는 사람도 있다.

앞으로 두달여 동안 지루하게 진행될 보르도 법정의 공방은 한 특정인에 대한 처단을 통해 정권이 저지른 과오를 바로잡고 역사와 화해할 수 있는 것인지 곰곰 생각하는 기회를 프랑스 사람들에게 제공할 것이다.

파리 = 배명복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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