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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편지로 北核 대화 의사 밝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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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이 부인 힐러리 클린턴 상원의원, 딸 첼시와 함께 21일 자신의 회고록 ‘마이 라이프’의 출간기념회가 열리는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도착한 뒤 참석자들에게 웃음으로 답하고 있다.

▶ 클린턴이 1996년 백악관 뜰에서 열린 한 파티에서 성추문사건의 주인공 모니카 르윈스키를 포옹하는 모습. 당시 르윈스키는 백악관 인턴사원이었다.

▶ 1975년 10월 11일 결혼식 날 힐러리와 클린턴.

▶ 1949년 클린턴의 모습.

▶ 어머니 품에 안긴 클린턴. 클린턴은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면 언제나 외가가 있던 뉴올리언스가 떠오른다고 말한다.

▶ 클린턴이 재즈에 매력을 느낀 것은 열다섯살 때였다. 그의 색소폰 실력은 수준급이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뉴올리언스를 묘사한 ‘초승달 도시’를 즐겨 연주했다.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의 회고록 '마이 라이프(My Life)'가 22일 일제히 판매에 들어갔다. 클린턴의 고향인 아칸소주 리틀록과 뉴욕.워싱턴의 서점들은 이 책을 앞다퉈 사려는 고객들을 위해 이날 자정에 문을 열었다. 초판으로서는 전 세계 최다 기록인 150만부를 찍었다.

클린턴이 이 책 한권으로 챙긴 선인세는 1000만달러가 넘는 것으로 전해졌다. 우리나라에서는 '빌 클린턴의 마이 라이프'(물푸레)라는 제목으로 나왔다. 1권은 미국과 동시 출간됐으며, 2권은 다음달 7일 선보인다.

# 당선자 부시와의 만남

조지 W 부시 당선자에게 임기 8년을 돌이켜 볼 때 당선자가 직면할 가장 큰 안보 현안은 ▶오사마 빈 라덴▶알카에다▶중동 평화 문제▶인도-파키스탄 핵대치 상황▶파키스탄.탈레반.알카에다의 연계▶북한▶이라크라고 알려줬다. 그리고 "가장 실망스러운 것은 빈 라덴을 잡지 못한 것"이라고 말했다. "북한의 미사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북한과 거의 거래를 매듭지었지만 이를 완성하려면 당선자가 직접 북한을 방문해야 할 것"이라고 충고했다. 부시 당선자는 별 반응 없이 내 말을 들었고 "그 일을 어떻게 했느냐"고 짧게 물은 뒤 화제를 바꿨다.

# 북핵 위기 회고

1994년 6월의 가장 큰 국제 이슈는 북한이었다. 북한은 그해 3월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찰단이 사용후 핵연료봉을 플루토늄으로 전환했는지 검증하려는 걸 막았다. 유엔에 대북 제재를 촉구했고, 군사행동을 할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았다. 상황은 갈수록 나빠졌다.

그런데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이 "내가 북한에 가겠다"고 말했다. 북한 문제를 담당하고 있던 로버트 갈루치 대사를 카터에게 보내 이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 설명하게 했다. 그래도 카터 전 대통령을 보낼 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다. 그보다 3주일 전쯤 나는 전쟁이 터지면 남북한이 얼마나 큰 피해를 볼지에 대한 분석 보고서를 받았었다.

6월 16일 카터 전 대통령이 평양에서 전화를 걸어왔다. 긍정적 변화가 있으니 미국 정부가 고위급 협상을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북한이 정말 대화에 동의했는지 의심스러웠다. 이전의 경험 때문에 북한을 믿을 마음이 없었다. 일주일 사이 김일성이 나에게 편지를 보내 카터에게 했던 말을 재확인했다.

94년 나폴리 G7 정상회담이 있기 하루 전에 김일성이 사망했다. 김일성 사망을 기리는 뜻에서 핵문제 협상을 위한 제네바 회담은 한달간 유예됐다.

내가 퇴임한 뒤 미국은 북한이 제네바 협정의 정신을 위반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때문에 몇몇 사람은 "제네바 협정의 유효성이 의문시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우리가 방치했다면 북한은 매년 핵폭탄 7~8개를 만들 수 있는 플루토늄을 생산했을 것이다.

# 대통령 당선

당선의 기쁨을 누릴 틈도 없었다. 11주 만에 우리 가족은 아칸소에서 백악관으로 모든 것을 옮겨야 했다. 또 뽑아야 할 인물은 왜 그렇게 많은지. 부시 쪽 사람들과 협의하는 일도 보통이 아니었다. 국가안보에 관한 브리핑을 받고 외국 지도자들에게 전화를 걸고 의회에 제출할 경제정책을 손질하고 선거공약을 실천하기 위해 머리를 짜는 일 등 온통 일뿐이었다.

국제정세도 끔찍했다. 유엔 제재를 피하기 위해 꿍꿍이를 꾸미는 이라크, 기아구조를 위해 부시 대통령이 미군을 파견했던 소말리아, 민족주의와 경제 부진으로 고통을 겪던 러시아. 신경 쓰이는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취임 초 내게 깊은 인상을 남긴 각료는 조지타운대의 교수였던 매들린 올브라이트였다. 나는 그녀를 유엔주재 대사로 내정했다. 내가 그녀를 처음 만난 것은 듀커키스의 선거유세장에서였다. 체코 출신으로 바츨라프 하벨 체코 대통령의 친구인 매들린은 열정적이고 분명한 '민주.자유의 옹호자'였다. 유엔에서 활동할 이상적인 '미국의 대변인'이라고 나는 판단했다. 나는 유엔주재 대사의 직급을 각료급으로 격상시켰다.

# 부시 암살 기도에 대한 보복

나는 93년 6월 마지막 주 군에 처음으로 바그다드 폭격을 명령했다. 토마호크 미사일을 23발 발사했다. 조지 부시 전 대통령을 암살하려고 기도한 데 대한 보복이었다. 부시 전 대통령의 쿠웨이트 방문 전날인 4월 13일 암살 관련자 수십명이 체포됐다. 이들이 갖고 있던 장비들은 이라크 정보부와 관련돼 있었다. 체포된 사람들은 5월 19일 이라크 정보부가 배후라고 고백했다.

미사일 대부분은 목표물을 명중했지만 4개는 목표물을 빗나갔고, 3개는 민간인 지역을 때려 사망자를 냈다. 이 일로 나는 아무리 계획을 잘 짜고 최첨단 무기를 동원해도 피해는 불가피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 르윈스키 스캔들과 탄핵

98년 8월 15일 일요일 아침, 뜬눈으로 밤을 새운 뒤 힐러리를 깨워 나와 모니카 르윈스키 사이에 있었던 일을 털어놓았다. 그녀는 나에게 한방 얻어맞은 것처럼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할 수 있는 말이라곤 미안하다는 말밖에 없었다.

첼시에게 진실을 말하는 것이 더 힘들었다. 모든 자식은 언젠가는 자기 부모도 완벽한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지만 그 일은 아무래도 정상의 범주에서 벗어난 것이었다.

며칠 뒤 우리 가족은 마사스 반야드로 휴가를 떠났다. 그곳에서 힐러리는 침실에서 잠을 자고 나는 소파에서 잠을 청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도 별로 화해의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힐러리와 나는 일주일에 한 차례 상담을 받기 시작했다. 1년가량 계속했다. 내 생애 처음으로 나의 감정과 경험, 삶과 사랑에 솔직할 수 있었다. 그 과정에 나의 행동 밑바닥에는 어린 시절의 아픈 경험이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10월에 헨리 하이드가 이끄는 공화당 소속 하원의원들이 탄핵에 대한 압박을 계속했다. 민주당 의원들은 나에 대한 최악의 비난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탄핵까지 할 정도로 '중대한 죄와 비행(high crimes and misdemeanors)'은 아니라고 받아치고 있었다.

나에 대한 탄핵안은 12월 19일 하원을 통과했다. 공화당 의원들은 르윈스키와 나의 말이 일치하지 않을 때는 르윈스키의 말만 믿는 게 분명했다. 그래도 나는 워터게이트의 기준을 적용했다면 탄핵 대상이 되지 않는다고 믿었다. 탄핵안이 하원을 통과하자 나보다 더 화를 낸 사람이 힐러리였다. 젊은 시절 힐러리는 하원 법사위원회 존 도어 의원의 보좌관으로 워터게이트 사건에 관여했는데, 그때는 '중대한 죄와 비행'을 정의하려는 노력이 초당적으로 펼쳐졌다는 것이다.

탄핵안은 결국 이듬해 2월 12일 상원에서 부결됐다. 탄핵의 시련이 끝난 뒤 많은 사람은 내가 고통 속에서도 평상심을 잃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를 궁금해 했다. 백악관 참모와 각료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만델라와 블레어.김대중 같은 세계적 지도자의 지지도 큰 힘이 됐다.

르윈스키 스캔들이 터지고 탄핵안이 상원에서 최종 부결되기까지 나는 거의 매일 밤 두세시간씩 혼자 보냈다. 주로 성경과 용서에 관한 책을 읽었다. 그리고 르윈스키와의 관계로 시달릴 때 나는 신약성경 요한복음 8장7절('사람들이 간음한 여자를 돌로 쳐 죽이고자 하자 예수는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했고…')을 새긴 돌을 갖고 있었다.

정명진 기자, 워싱턴=김종혁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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