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박보균의 세상 탐사

MB, 숫자로 군기 잡기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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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MB) 대통령은 숫자에 강하다. 숫자를 담은 말의 경쟁력은 높다. 힐러리 클린턴 미국 국무장관은 지난달 한·중·일을 순방했다. 3개국 지도자를 만났다. “정상들 중 이 대통령과의 대화가 겉돌지 않고 실질적이었다”는 게 클린턴의 평가라고 한다(중앙일보 3월 12일자). 외교 소식통은 “이 대통령은 녹색성장과 기후변화를 설명하면서 다양한 자료를 인용했다. 수치를 적절히 넣은 MB의 설명에 클린턴은 강한 인상을 받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숫자는 MB의 리더십 관리 무기다. 말에 수치를 섞으면 설득력은 커진다. 아랫사람을 장악하는 데 효과가 있다. 정부 고위 인사였던 Z씨는 이런 사례를 소개한다. “장관과 청와대 참모의 능력을 확인하는 MB의 독특한 방식이 있다. 숫자를 무기처럼 가끔 뽑아 든다. 숫자와 관련된 질문을 불쑥 던진다. 그때 주춤하거나 순발력이 없으면 그 사람에 대한 MB의 신임은 줄어든다. 강만수 전 기획재정부 장관은 미·일 주가 동향 등 경제 수치를 열심히 꿰고 있었다. 경제팀장의 일상적 자세지만 MB의 기습적인 질문에 대비하는 측면도 강했다. 박병원 전 경제수석(지난 1월 퇴진)은 이 대통령의 그런 스타일에 익숙하지 않았다. 이 대통령의 경제 수치 물음에 머뭇거려 난처한 상황에 놓인 적도 있다.”

그 방식은 MB의 현대건설 CEO 시절 노하우다. 현장소장들의 군기를 잡을 때 활용했다. 다음은 대선 참모 출신인 Q씨의 이야기. “MB는 현장소장들과의 대화 자리에서 시멘트를 얼마 썼고, 철근이 몇t 들어갔느냐고 예고 없이 묻는다. 답변이 시원치 않으면 염장을 지르는 듯한 핀잔도 던진다. 물론 격려도 곁들인다. 하지만 분위기는 긴장된다. 현장소장들은 수세적 입장으로 바뀐다. 짧은 시간에 많은 부하를 장악하는 MB식 재주다.”

이 대통령의 언어는 실용 감각에 충실하다. 감정을 주입하는 데 말을 허비하는 것을 싫어한다. 세계적 경제위기다. 숫자에 밝은 것은 리더십의 국민적 기대치를 높인다. 하지만 정책의 세부 숫자를 챙기는 국정 습관은 부작용도 낳는다. 장관들은 대통령 스타일에 맞추는 데 시간을 소비한다. 국정의 큰 그림을 그리는 데 소홀해진다.

그 그림은 정권의 정체성이다. 정체성 확립은 국정 목표와 시대정신을 묶는 작업이다. 그걸 통해 국민적 단합을 이루어 낸다. 숫자를 뛰어넘는 미묘한 분야다. 집권 2년이면 정체성은 뚜렷한 윤곽을 드러내야 한다. MB 정권은 그렇지 못하다. 다수 국민은 대선·총선 때 정체성의 틀을 짜 주었다. 그 핵심은 경제 살리기와 법 질서 바로 세우기다.

지난번엔 경찰관이 두들겨 맞았다. 용산 참사 추모집회 참석자들의 집단폭행은 위기의 법치를 실감시켰다. 위기가 기회라는 것은 MB의 상용어다. 그 반전의 묘수는 경제에만 적용되는 게 아니다. 공권력 회복도 같다. 그러나 기회를 살리지 못하고 있다. 전략과 신념이 부족하다. 이달곤 행정안전부 장관의 행적은 그런 사례다.

이 장관은 경찰 업무의 일정 부분을 지휘·감독한다. 국무회의에서 경찰을 대변한다. 지난주 행안부가 언론에 중점 공개한 장관 동정이 있다. 미디어 적응 훈련이다. “아, 음∼” 하는 군소리와 시선 교정을 받았다는 것이다. 교수 출신 신인 장관의 홍보 트레이닝은 필요하다. 하지만 순위와 타이밍이 있다. 김석기 경찰청장 후보 퇴진에다 집단폭행 건으로 경찰의 의욕은 떨어졌다. 이 장관은 매 맞은 경찰관을 찾아 위로·격려하는 데 우선 주력했어야 했다. 공권력이 헝클어지면 서민이 가장 피해를 본다는 점을 역설했어야 했다. 그런 장면을 세련되게 드러내는 게 미디어 홍보다.

MB의 지지율은 35% 안팎이다. 정권의 정체성은 무형의 권력 자산이다. 수치로 표현하기 어렵다. 정체성이 명료하면 지지율은 올라간다. 선명한 정체성은 정권의 성공을 뒷받침한다.

박보균 중앙일보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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