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규웅의 문단 뒤안길-1970년대 <6>김현의 ‘말 트기 주의’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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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호 12면

젊은 날의 김현

1990년 김현이 4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을 때 김병익은 추모의 글을 통해 ‘오늘의 나를 있게 한 것은 8할이 그의 덕택’이라고 했다. 비단 김병익뿐만 아니다. 김현에게 가르침을 얻었거나 그가 쓴 책을 읽고, 혹은 그에게서 영향을 받았거나 그의 강력한 권유로 문학의 길에 들어선 사람이 이 땅에는 수를 헤아릴 수조차 없이 많다. 그가 동서고금의 무수한 명저를 두루 섭렵하고, 전공인 불문학뿐만 아니라 우리말과 우리글의 순수성과 아름다움을 찾아내는 데 온갖 정성을 모둔 한글세대의 대표적 비평가였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매우 꼼꼼하고 치밀한 성격을 지녔으면서도 대인관계에서는 누구보다 대범하고 남의 의견을 존중하는 둥글둥글한 성품의 소유자였다. 동인 활동을 하다가 문우들이 문학적 견해 차이로 등을 돌릴 때도 이해와 관용으로 오히려 그들을 격려했고, 동인끼리의 의견충돌 때도 훌륭한 조정 역으로 쉽게 융화시키곤 했다. 그런 성품 때문이었던지 그는 ‘사해동포(四海同胞)주의’라는 표현을 즐겨 썼다. 모두가 이웃이요, 형제라는 뜻이다.

그 ‘사해동포주의’에 뿌리를 둔 것이 그의 ‘말 트기 주의’였다. 김현은 ‘문학과 지성’과 관계를 맺은 모든 문인에게 서로 말을 틀 것을 ‘강요’했다. 서로 말을 높이면 벽이 생겨 관계가 원만해지기 어렵다는 것이 이유였다. 김현의 그 ‘말 트기 주의’는 젊은 시절부터 심중에서 싹이 트고 있었던 듯하다.

60년 초가을 서울대 문리대 교양학부의 문B반(영·불·독문과 1학년) 강의실에서는 교양국어의 2학기 첫 강의가 시작되고 있었다. 강단에 선 젊은 비평가 이어령 강사는 1학기 말 노시인 강사의 교양국어 강의가 부실하다는 이유로 학생들에게 보이콧당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터여서 약간 긴장한 표정이었다. 수인사가 끝나고 강의에 들어가려는 순간 불문과의 김광남(김현) 학생이 벌떡 일어나 질문을 던졌다.

“교수님. 나이 차이가 열 살이 안 되면 벗 삼아도 된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이어령은 질문의 의도를 몰라 잠깐 어리둥절해하다가 다소의 장난기가 들어 있음을 알고 희미한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의 입장이 되면 이야기가 다르겠지요.”

그때 이어령은 26세의 소장학자였고, 학생들은 일고여덟 살 아래인 스무 살 안팎의 1학년생이었다. 강의실에선 잠깐 웃음꽃이 피었고, 덕분에 긴장감은 다소 가라앉았다.
우연찮게도 김현은 그로부터 8년 후인 68년 이어령과 똑같은 26세의 나이로 처음 대학 강단에 섰다.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 교수였던 김동리의 강권에 못 이겨 한 학기 동안 문예이론을 강의한 것이다.

그때 김현의 강의를 들었던 학생 가운데 여럿이 다투어 문단에 데뷔하게 되거니와 그중 김형영 시인이 ‘문지’ 그룹과 가까워져 자주 어울리게 되면서 김현은 그에게 말을 놓으라고 윽박질렀다. 김형영은 처음에는 마지못해 어설프게나마 말을 놓았으나 ‘잠깐 배웠어도 스승은 스승인데…’ 하는 생각이 반말을 가로막아 결국은 말을 놓지 못하게 되고 말았다.

‘문지’의 4K 중 김현은 막내였다. 김치수와 김주연은 대학 동기동창이었으나 한두 살이 많았고, 김병익은 나이도 네 살이나 위인 데다 같은 대학 3년 선배였다. 그래도 이들 간의 말 트기는 아주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하지만 ‘문지’와 인연을 맺게 된 문인들의 숫자가 갈수록 늘어나면서 김현의 ‘말 트기 주의’는 제동이 걸렸다.

김병익과 같은 또래인 황동규나 홍성원까지는 비교적 수월하게 말 트기가 이뤄졌으나 김병익 또래보다 나이가 위인 몇몇 문인은 김현의 말 트기를 거북해한 것이다. 김현이 말을 놓고 이야기하거나 이름을 부르면 딴청을 부리는 문인이 있는가 하면,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드러낸 문인도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김현의 ‘말 트기 주의’는 다섯 살까지가 한계였던 듯하다.

말이 나온 김에 기자의 체험도 털어놓자. ‘문지’ 그룹과 자주 어울리던 시절 김현은 자기처럼 김병익이나 황동규에게 ‘야, 병익아, 동규야!’라 호칭하라고 ‘지시’했다. 김병익과 황동규는 같은 대학 3년 선배였고, 특히 황동규는 같은 영문과의 3년 선배였다. 기자가 말을 놓지 못하고 어물거리자 어느 날 김현은 선언하듯 말했다.
“너희 세 사람, 앞으로 말을 놓지 못하면 그날 술값은 말을 놓지 못하는 친구가 부담하기로 한다!”


중앙일보 문화부장·논설위원 등을 역임했다. 문학 평론가로 추리소설도 여럿 냈다. 1960년대 문단 얘기를 다룬 산문집 『글동네에서 생긴 일』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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