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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e칼럼

단단한 룩셈부르크 요새 속의 Kikuoka CC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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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서 국민소득이 가장 높은 나라 룩셈부르크. 인국 40만 명, 면적은 고작 제주도의 1.4배지만 GNP는 우리의 4배, 유럽 내에서 실업률 최저, 문맹률은 0에 가까운, 작지만 잘 사는 나라. 나라의 이름과 수도의 이름이 모두 룩셈부르크인 도시 국가는 첫 알파벳 L을 대문자와 소문자로 구분해 나라 이름과 수도 이름을 표기하는 모양이었다.

브뤼셀에서 7시간 여를 달려 룩셈부르크 수도에 도착했다. 오는 내내 유난히 언덕길이 많다 싶더니 시가지는 깊은 계곡이 내려다보이는 절벽 위에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초록 숲과 얽혀있는 석조 건물들, 건설 당시 세계 최대 규모의 아치교로 이목을 끌었다는 아돌프 다리… 언덕에서 내려다본 룩셈부르크는 싱싱하면서도 단단하게 느껴졌다. 마치 요새를 들여다보는 느낌이었다.

유럽 강대국 사이 고원에 위치한 내륙 국가 룩셈부르크. 지정학적인 위치 때문에 중세 말기까지 전쟁이 끊이지 않아 스페인, 프랑스, 오스트리아, 프로이센이 400년 동안 20차례 이상 침략해 왔고 그 동안 룩셈부르크는 파괴와 재건을 되풀이 하며 방어 진지를 구축했다고. 그 결과 북쪽의 지브룰터라 일컬어지는 제2의 요새 도시가 탄생한 것이다. 이제 그 단단한 구시가지와 요새는 1994년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룩셈부르크 관광의 핵심을 형성하고 있었다.

제주도 보다 조금 크고 경기도의 1/4에 불과한 룩셈부르크의 사이즈를 실감할 수 있었던 일화가 하나 있었다. 영국에서 시작한 여행이 5개월을 넘어가고 있는 사이 우린 많이 지쳐 있었던 모양이다. 거리를 막론하고 좋은 골프장을 찾아 다니던 초기의 열정이 많이 사그라들었고, 그저 우리 동선에 걸리는 가까운 골프장 위주로 발길이 옮겨지던 즈음이었다. 룩셈부르크에는 나라 전체를 통틀어 6개의 골프장이 있다고 들었다. ‘잘 사는 나라이니 골프장은 다 괜찮을 것이다’ 괜히 랭킹 따지지 말고 무조건 숙소에서 가까운 골프장으로 가기로 합의를 했다. 그 작은 나라에서도 몇 걸음 더 걷는 것이 싫을 만큼 지쳐있었다. 시내에서 조금 벗어난 곳에서 1박을 하고 최단거리 골프장을 찾아보았다. 우리가 가진 네비게이션에는 현 위치에서 가장 가까운 골프장을 검색할 수 있는 기능이 있었다. 불과 5분 거리에 골프장 하나가 검색되었다.

찾아가보니 아주 최근에 지어진 골프장이었다. 프론트에서 그린피를 내고 티타임을 받고 코스 정보를 얻고 난 후 뒤 돌아서려다 한 번 물어보았다. “이 골프장은 룩셈부르크 6개 골프장 중에 몇 등인가요?” 순간 당황하는 직원 “저… 여긴… 프랑스인데요.” 컥~ 룩셈부르크 시내에서 가장 가까운 골프장이 프랑스 골프장이라니… 장갑을 벗고 내려 놓았던 골프백을 다시 차에 실어야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랭킹 1위를 찾아 나섰다. 나무가 별로 없는 구릉에 위치한 Kikuoka CC. 이름에서도 느껴지듯, 과거 일본이 미국을 위협할 정도의 경제 성장으로 골프장 사업 역시 해외 진출을 모색하던 시절 건설된 골프장이다. 현재까지 이름은 그대로 사용하고 있지만 소유권은 룩셈부르크로 넘어온 상태라고.

골프장에 대해 이것 저것 설명해주던 매니저의 영어가 너무 유창해 몇 개 국어를 하는지 물었더니 무려 7 개 국어란다. 작은 나라에 살다 보니 인접한 독일, 프랑스어는 기본이고 네덜란드어와 영어는 학교에서 배웠고 개인적인 관심으로 일본어를 공부했다고, 포르투갈 아버지와 파라과이 어머니의 영향으로 포그투갈어와 스페인어까지… 다른 친구들도 4~5 개 국어는 기본이라고 했다. 친구들끼리 이야기를 하다 보면 2~3 개 국어가 섞이는 것은 일상이라고 하니 돈으로 도배를 하여 완성된 나의 생존 영어는 그저 부러울 따름이었다.

모젤 와인 생산지와 인접한 룩셈부르크였기에 클럽하우스 레스토랑은 와이너리처럼 다양하고 질 좋은 와인과 안주 메뉴를 두루 갖추고 있었다. 주당인 동반자는 알코올의 유혹으로 괴로운 눈치였다. 코스가 내려다보이는 야외 테라스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대형 파라솔이 테라스 전체를 덮고 있었고 각양각색의 꽃들이 테라스를 에워싸고 있었다. 동반자의 눈은 여전히 와인 진열대에 꽂혀 있었지만 애석하게도 모젤 와인은 포기했다. 시간이 빠듯했던 탓에 스파게티를 시켜 후루룩 말아 먹고 얼른 코스로 나섰다.

120 ha 부드러운 구릉지대에 자리잡은 Kikuoka CC는 일본인이 디자인한 코스지만 일본스러운 조경미는 별로 느껴지지 않았다. 인공적으로 코스를 꾸민 흔적 보다는 있는 그대로 자연적인 곡선을 살리고 있었고 숲을 조성하기 보다는 구릉의 언듈레이션을 둥글리듯 펼쳐놓은 코스였다. 하지만 어려웠다. 나무가 별로 없이 잔디가 넓게 펼쳐져 있어 만만하게 느껴졌는데 홀을 거듭할수록 만만치 않은 포스가 느껴졌다. 워터해저드 몇 개와 90개의 벙커가 어우러지면서 우리의 골프 실력을 엄격하게 테스트하고 있었다.

1991년 개장한 18홀 6,444m 코스는 샷의 정확성을 시험하듯 삐뚤 빼뚤한 라이로 애간장을 녹였고 장비의 파워를 시험하듯 긴 해저드로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현대적 감각과 파워를 겸비해야 했기에 스코어에 초연한다면 무척이나 재미있는 경기를 즐길 수 있는 단단한 코스였다. 게다가 18홀 그린에서는 무지개까지 띄워주는 센스~!

이다겸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