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포럼]이회창대표가 사는 길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이회창 (李會昌) 대표는 요즘 인기라는 것이 얼마나 물거품 같은 것인가를실감하고 있을 것이다.

신한국당이 4.11 총선을 치를 형편이 못될 정도로 인기가 떨어졌을 때 그를 영입해 선거를 치렀다.

불과 두달 전까지만 해도 그의 인기는 경쟁자인 양金씨를 모두 합친 것보다 높아 이번 선거는 거의 승패가 결정된 듯한 분위기였다.

영부인 얘기도 나오고 공신 (功臣) 논쟁까지 나올 정도였다.

그러나 지금은 역대 여권 후보중 가장 취약한 후보로 떨어져 2등을 놓고도 허덕이는 처지가 됐다.

사실 정치에서 인기라는 것은 변화무쌍 그 자체다.

걸프전때 미국민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던 조지 부시 대통령이 시골 주지사였던 빌 클린턴 대통령에게 형편없이 패배했다.

취임초 90%대의 지지를 누렸던 김영삼 (金泳三) 대통령은 지금 어떤 처지에 있는가.

선거가 표로써 결정되니 정치인이 인기에 도움이 될듯 싶으면 물불을 안가린다.

후보들이 앞다퉈 앞치마를 두르고 TV카메라 앞에서 아양을 부리고, 박정희 (朴正熙)가 인기가 있다 하니 머리모양까지 똑같게 하고 나서고, 수족들의 적폐를 염려하는 소리가 나오니 집권하면 한자리 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씌워 줄을 세우는 모습까지 연출시킨다.

그렇게 해서 지지가 올라간다고 믿고 있으니 당사자들이 얼마나 국민을 바보로 여기고 있는지 알만하다.

되돌아 보면 이회창 대표에 대한 인기는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자기 소신을 지키기 위해 총리직을 스스로 던져버리고 나온 그의 원칙주의가 공감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었다.

全.盧 비리 사건에 줄줄이 걸려든 정치인들을 개탄하면서, 한보사건에 연루된 부패 정치인들을 보면서 더 이상 기성 정치인에겐 희망이 없다는 공감대 속에서 그의 '법대로' '대쪽' 이미지가 자연스럽게 만들어준 인기였다.

그러던 그가 자기의 상표를 버리고 정치인을 닮아가면서 인기는 계속 떨어졌다.

아들 병역문제만 해도 그다운 처리가 아니었다.

다 지나간 일이지만 정말 떳떳하다면 당당히 청문회를 요구하든지, 아니면 솔직히 털어놓고 사과를 하고, 책임 지울 것은 책임 지우고 난 뒤 국민의 판단을 구했더라면 어떠했을까. 잘못이 없는 아들을 외딴섬에 보내는 일도 원칙이 아니요, 또 잘못이 있다면 섬에 들어간다고 면책될 일도 아니다.

원칙을 버리고 기성정치인 방식의 해결책을 좇다보니 이도 저도 안됐다.

그뿐이 아니다.

TK 인기를 의식해 원칙에도 맞지 않는 全.盧 사면을 요구하는가 하면 자유시장의 원칙에도 어긋나게 기아사태에 개입하려다 실패했다.

급한 김에 자민련이라도 잡아볼 요량에서인지 대통합론을 내세웠다가 보수회귀니, 문민정부 이반이니 하는 아우성이 나오고 있다.

인기를 의식하지 않고 원칙을 지켰을 때는 기대하지도 않던 지지가 따르는데 인기를 좇아가니 지지는 더욱 멀어져만 간다.

그것이 바로 민심이다.

특히 李대표의 경우는 처음부터 그럴 운명에 놓여 있었다.

李대표가 기성정치인과 차별성이 없었다면 누가 정치 초년생인 그에게 관심을 가졌겠는가.

단순히 병역문제만이 아니다.

그가 정치권에 들어서면서 주변을 자기의 색깔로 바꾸지 못하고 반대로 주변에 함몰된데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닐까. 李대표는 이제 중대한 선택의 시점에 와 있다.

계속 기성정치인 흉내를 내면서 나갈 것이냐, 아니면 자신으로 돌아갈 것이냐를 정해야 한다.

5%의 인기를 더 얻어 2등만 된다면 김대중 (金大中) 후보와 양자구도를 만들어 지역감정을 이용해 이길 수 있다는 식의 정치인식 계산에 매달릴 것인가, 아니면 떨어지더라도 자신의 정체성 (正體性) 을 지켜갈 것인가를 결심해야 한다.

오죽하면 세번 심판을 받고도 다시 나온 후보나 경선 결과를 발로 차고 민주주의 원칙을 짓밟고 나온 후보보다 지지를 얻지 못하고 있는가.

그것이 정치기술 부족에 기인한 것인지, 청와대 꿈에만 급급해 원칙이 무너진 탓인지 자신이 가장 잘 알 것이다.

흔히들 그의 주변에서는 이제 6.29 같은 승부수를 던져야 할 때라고 한다.

그러나 그 승부수가 무엇인지 찾지를 못해 안타깝다고도 한다.

아직도 그런 식의 재치로 인기를 회복하겠다는 발상이다.

그러나 진정한 승부수는 원칙과 진실이다.

총리를 그만 둘 때의 심정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문창극 논설위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