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의자 진술거부권을 통해 본 변호사 윤리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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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호 35면

요즘 들어 직접 수사를 하는 검사들에게서 범죄 피의자들이 진술거부권을 행사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헌법상 보장된 권리를 행사하는 사람이 많아진다는 것은 언뜻 보기에 바람직해 보인다. 그러나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않고 변호인을 선임하기도 쉽지 않은 서민층 피의자들보다 비싼 수임료를 주고 전관 경력이 있는 변호사들을 선임하는 피의자들일수록 이런 경우가 많은 게 현실이다. 짚어 봐야 할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일선 검사들은 피해자가 강간이나 폭행을 당했다고 명백하게 진술하고 목격자까지 있는데도 피의자가 출석을 거부하거나, 출석해 변호인 동석하에 진술거부권을 행사한다며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는 일이 잦다고 말한다. 왜 이런 일이 생길까. 대부분 담당 변호사가 자신의 고객인 피의자에게 ‘묵비권 행사가 최선의 방어’라고 조언하기 때문이다. 변호사는 또 조사 과정에 참여해 검사(또는 경찰관)가 사건의 실체를 조금이라도 진술하라고 권유·설득하면 곧바로 조사를 중단시킨다. 이후 피의자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권유한다. 실체적 진실을 밝혀내야 하는 검사로서는 이처럼 시인도, 부인도 하지 않으면 답답하기 짝이 없게 된다.

피의자가 수사기관에서 자신에게 불리한 내용을 진술하지 않는 것을 잘못이라고 탓할 순 없다. 그러나 정도가 지나치면 문제가 된다. 무분별한 묵비권 행사가 과연 피의자에게 유리한 것인지, 변호 방법으로 바람직한 것인지 의문이 생기는 이유다.
억울하게 누명을 쓴 피의자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설사 유죄가 확실한 피의자라 하더라도 정상 참작 사유가 있을 수도 있다. 피해자가 원인을 제공했을 경우 등이다. 이런 경우 검사가 사실관계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만 있다면 기소유예 처분을 하거나 가벼운 벌금형으로 종결할 수 있다. 그런데도 피해자가 과장된 진술을 계속하고 피의자는 해명이나 증거 제출을 일절 하지 않았기 때문에 구속되거나 법원에 정식 기소돼 장기간 재판을 받게 된다면 얼마나 억울하겠는가?

일본에서는 이런 일이 실제로 벌어졌다. 1994년 12월 16일 일본 도쿄지방재판소에서다. 나이트클럽에서 알게 된 여성을 승합차에 태운 후 차 안에서 강간해 상처를 입힌 사건이었다. 구속기소된 피고인은 재판 과정에서 ‘강간이 아니라 피해자와 합의에 따라 성관계를 가진 것’이라며 강력하게 무죄를 주장했다. 재판장은 피고인에게 무죄를 선고하면서 그곳에 있던 변호사를 엄중하게 꾸짖었다.

“검찰 수사 과정에서 변호사가 피고인에게 어떤 말도 하지 말라고 조언해 시종 묵비권을 행사한 결과 검사는 피고인의 변명을 전혀 듣지 못한 상태로 기소했다. 수사 단계에서 여성도 성관계에 동의했다는 등 합리적으로 변명하고 그에 맞는 증거를 제출했다면 검사가 피해자의 진술이 합리적인지 더 꼼꼼하게 따져 볼 수 있었다. 그럼에도 필요 이상으로 묵비하고 부인으로 일관했다. 변호사는 구속 및 구속기간 연장에 대한 준항고, 구속적부심사 청구 등을 남발했다. 이런 과잉 변론 활동이 피고인에게는 불기소 처분을 받을 수도 있다는 이상한 기대감을 갖게 함과 동시에 오히려 검사에게는 기소를 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결과를 초래했다. 수사 단계에서 형사사건의 절차에 관해 정확한 판단을 할 수 있는 변호사가 한 명이라도 선임됐다면 피고인이 장기간 구금돼 재판을 받는 고통은 없었을 것이라 실로 애석하기 그지없다.”

모든 국민은 형사절차에서 자신에게 불이익한 진술을 강요당하지 않을 권리가 있다. 하지만 무턱대고 진술을 일절 거부하거나 부인하는 것은 결코 좋은 방법이 아니다. 이런 일을 권유하는 변론이 의뢰인에게 거꾸로 불리한 결과를 가져오는 경우도 허다하다. 결과적으로 검찰 측이 충분한 증거 검토나 검증을 할 수 없고, 그에 따라 잘못된 결론을 내릴 수도 있으며, 법원에서 유죄로 인정될 경우 자백한 경우보다 중형을 선고받을 위험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누군들 죄가 없는 사람을 처벌하고 싶겠는가? 억울한 사정이 있다면 검사나 경찰관에게 적극적으로 설명하고 유리한 증거를 제시하면서 조사를 받는 것이 상책이다.
어쩔 수 없는 사정으로 범죄를 저질렀다 하더라도 깊이 반성하고 피해를 회복시켜 줌과 동시에 자백해 상응한 처벌을 받는 것이 가장 유리한 선택이다. 묵비나 부인으로 처벌을 면하는 것은 정의에 부합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당사자의 소명이 제대로 안 이뤄져 범행보다 무거운 처벌을 받는다면 그것도 정의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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