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규웅의 문단 뒤안길-1970년대 <5>창비 VS 문지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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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호 13면

계간지 39문학과지성39창간호 표지

‘한국문학’과 이문구가 청진동 한복판에 정착하기 전 청진동 일대를 ‘문인들의 거리’로 탈바꿈시키는 데 기초를 다진 사람들은 ‘창작과 비평’ ‘문학과 지성’ 두 계간지에 직간접으로 간여하던 문인들이었다. ‘창비’는 1966년 1월 창간호를 내면서부터 청진동과 그 주변이 거점이었다. 제작을 의뢰한 일조각 등 출판사와 인쇄소가 그곳에 있었고, 70년대에 들어서면서 마련하게 된 독립 사무실도 마찬가지였다. ‘문지’ 역시 70년 9월 창간호를 내기까지 청진동 일대가 이를테면 ‘산실’ 같은 곳이었다.

참여문학을 내세운 ‘창비’는 창간 이후 4~5년간 착실하게 기반을 다져 70년대에 이르러서는 무시하지 못할 문단 세력을 구축하고 있었다. 반면 나중에 ‘문지’의 깃발 아래 뭉치게 되는 일단의 순수문학 지향 그룹은 70년대에 들어서도 구심점을 찾지 못한 채 개별 활동으로 명맥을 잇고 있었다. 70년 9월 ‘문지’의 창간은 급속하게 이루어졌으나 우여곡절이 적지 않았다. 주인공은 김현이었다.

김현은 ‘문지’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산문시대’(62년), ‘사계’(66년), ‘68문학’(68년) 등 동인활동을 이끈 평론가였다. 60년대 몇 차례에 걸친 순수-참여 논쟁에서 일관되게 순수문학론을 옹호해 온 김현은 70년대에 접어들면서 참여론의 ‘창비’에 맞서는 동인지의 필요성을 절감하기 시작했다. 더욱이 일찍부터 문학적 이념의 뿌리를 같이했고, 60년대의 동인 활동을 함께했던 염무웅·박태순 등이 ‘창비’ 쪽에 가세하면서 김현의 마음은 더욱 조급해졌다.

김현은 우선 서울대 문리대 불문학과 동기동창인 김치수와 김승옥에게 취지를 설명하고 동인지 참여를 권유했다. 두 사람은 즉각 찬동의 뜻을 표했다. 특히 그 무렵 사진 식자 사업을 구상 중이던 김승옥은 사업이 성공하게 되면 동인지 발간 비용 전액을 부담하겠다고 나섰다. 하지만 김승옥의 사업은 언제 시작될는지, 성공을 거둘 수 있을 것인지 모두가 불확실했기 때문에 마냥 기다릴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김현은 동인지 참여도 권유하고 경비 문제도 의논할 겸 동아일보 문학기자로 있는 김병익을 만났다. 김병익은 김현의 강압적인 권유로 ‘68문학’에 참여, 평론활동을 시작하고 있었다. 김병익은 서울지법 판사를 그만두고 얼마 전 변호사 일을 시작한 고교 동창 황인철을 생각해 냈다. 그가 변호사를 개업하면서 뭔가 뜻있는 일을 하고 싶다는 의사를 비춘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세 사람을 만난 황인철은 동인지의 원고료 전액을 부담하겠노라고 흔쾌히 응낙했다. 이어 동인지의 제작과 영업을 맡아 줄 출판사를 찾던 세 사람은 일조각의 한만년 사장을 찾아갔다. 한 사장은 적잖은 비용 손실의 위험 부담이 예상되는데도 두말없이 응낙했다. 일조각은 ‘창비’의 제작과 영업을 맡아 해 주다가 ‘창비’의 독립으로 막 일손을 놓은 참이었다.

이제 제호와 편집 방향을 정하는 일만 남았다. 제호를 ‘문학과 지성’으로 정하게 된 데는 흥미로운 뒷얘기가 따른다. 당초 세 사람이 합의한 제호는 ‘현대비평’이었다. 이들은 한만년을 발행인으로, 황인철을 편집인으로, 제호를 ‘현대비평’으로 한 정기간행물 등록 서류를 만들어 문화공보부에 제출했다. 하지만 문공부는 서류를 되돌려 보냈다. ‘평론’이니 ‘비평’이니 하는 단어는 사이비 언론을 출현케 할 우려가 있으므로 제호를 바꿔 다시 제출하라는 요구였다. 다른 제호를 생각해 본 일이 없었기 때문에 세 사람은 난감했다. 그때 김현이 불쑥 말했다.

“‘문학과 지성’이라고 하면 어때?”
시간도 촉박하고 다른 의견도 없었으므로 세 사람은 동인지의 제호를 ‘문학과 지성’으로 결정해 서류를 신청했다. 표지 그림은 개인 사정으로 동인 참여를 사양한 김승옥이 그렸다. 커다란 원을 중심으로 불꽃 잎이 피어나는 모습인데 이 그림은 폐간되는 40호까지 매호 색깔만 바꾸어 사용됐다. 9월 초 마침내 ‘문학과 지성’ 창간호가 선을 보이게 됐다. 후에 김현은 웃으며 ‘제호는 문공부가 지어준 셈’이라고 말하곤 했다.

창간 작업은 그해 여름 무더위 속에서 착착 진행됐다. 마땅한 사무실이 없었으므로 세 사람은 대개 지금의 교보빌딩 자리에 있던 ‘비봉’ 다방에서 만나 편집회의를 했고, 필자 등 만나야 할 사람들도 그곳에서 만났다. 모임은 늘 김현이 주도했고, 그가 술을 즐겼으므로 ‘비봉’에서의 일이 끝나면 그들의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청진동의 술집으로 향했다. 독일 유학 중이던 김주연이 이듬해인 71년 귀국해 동인에 합류하면서 ‘문지’의 이른바 ‘4K 시대’가 열리기 시작했다.


중앙일보 문화부장·논설위원 등을 역임했다. 문학 평론가로 추리소설도 여럿 냈다. 1960년대 문단 얘기를 다룬 산문집 『글동네에서 생긴 일』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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