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김경원 칼럼

북한이 부드러워진 이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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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북한이 변하고 있는 것 같다.

우선 남한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한결 부드러워졌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북한 사람은 남한 사람만 보면 전투적인 자세로 나오는 것이 보통이었는데, 최근에는 남조선 사람과 만나도 비교적 편안한 자세로 정상적인 인사를 하는 사람이 많아진 것이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남북관계의 내용에서도 과거에 비하면 훨씬 신축성있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가령 서해상의 우발충돌 방지를 위한 남한 측의 제안을 북한이 받아들인 것은 상당히 의미있는 일이라고 할 수 있는데 군사분야에서 남북 간의 신뢰구축을 위한 실험에 합의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 경제 원조도 꼭 필요한 입장

그러면 북한이 이와 같이 달라지고 있는 사실을 우리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우선 북한이 그들의 기본전략까지 포기했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남조선에서 혁명이 일어나 조선반도가 통일된다고 하는 그들의 신앙에는 아무런 변화의 조짐도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현재 남조선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태를 보면서 북한은 그들의 전략이 정확했다고 믿을 것이 틀림없다.

원래 북한은 한.미관계와 조.미관계는 역비례한다고 보아 왔고 그렇게 행동해 왔다. 북한은 지금 벌어지고 있는 한.미 간의 불협화음도 남북관계가 크게 개선되고 있다는 남한 사람의 인식에 그 원인이 있다고 보고 있을 것이 틀림없다.

북한과 미국 간의 긴장이 북한의 핵무기 때문에 발생했다고 보지 않고 미국이 남북 간의 화해를 반대하기 때문에 제고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와 같은 논리 아닌 논리가 지금 남조선 사람들 사이에 널리 퍼지고 있는 것으로 판단하고 있는 것이다.

북한이 남한 측에 부드럽게 나오는 이유는 남북관계가 개선되고 있다는 인식이 한.미관계를 약화시킨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것은 실제로 한국인의 상당수가 남북관계가 크게 개선되고 있으며 앞으로 한반도에 전쟁은 없다고 믿는 데서 나온 결과다.

북한이 부드럽게 나오는 또 하나의 이유는 북한이 외부로부터 경제적 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몇년 전부터 북한은 미국.유럽.일본 등으로부터 경제협력을 받기 위해 노력했지만 한국 이외에는 경제협력을 하겠다는 나라가 없었다.

북한으로서는 한국 이외의 부유 국가로부터 원조받고 싶었겠지만 결국은 하는 수 없이 한국의 경제협력을 적극 받아들이기로 결심한 것 같다.

북한 경제가 최근에 다소 개선된 것 같다는 보고도 있지만, 대부분 외부로부터의 원조효과가 나타난 것에 불과하고 북한 경제가 구조적으로 개선된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북한은 '자주'와 '주체'를 부르짖으면서 실제로는 외세에 영구히 의존할 수밖에 없는 경제구조를 가지고 있다.

북한이 남한으로부터 경제협력을 받기 위해 대남 자세가 부드러워진 것이 사실이지만, 북한 스스로는 상당한 고민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왜냐하면 남한으로부터의 경제협력은 정치적으로 북한 체제에 위협을 주는 독약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북한은 한국을 향해 부드러운 표정을 하면서도 또 다른 한편으로는 바로 남북 간의 접촉과 접근을 북한에 유리하게 전략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길을 찾았다고 볼 수 있다.

*** 北의 새 도전 … 정신 바짝 차려야

북한은 남조선 인민, 특히 이른바 지식인들이 '민족주의'에 약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고 본다. 우리는 지난 반세기 동안 산업화.민주화.세계화 등의 과정을 거치면서 정신적으로 지쳐 있고 특히 합리주의는 필요한 정신적 자세인 것은 틀림없지만 심리적으로 감정이 메마른 논리의 세계로부터 '저 통일의 나라'로 도피하는 꿈을 꾸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이미 우리의 정신과 영혼은 민족주의라는 흥분제에 취약한 상태에 놓여 있다. 여기에 '우리끼리'하면 못할 것이 없다고 하는 무한한 가능성의 세계를 약속하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북한의 도전이 시작된 것이다.

북한이 부드럽게 나오는 이유는 경제협력을 끌어내기 위한 것도 있지만 전략적으로는 한.미관계를 약화시키고 남한 사람들이 민족주의라는 독주에 깊이 취하도록 하는 데 있다. 바로 이것이 우리들이 당면하는 북한의 도전이다. 정신차려야 할 때다.

김경원 고려대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