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재무부 관료에 매달렸다 …‘씨티’의 굴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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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씨티그룹 비크램 팬디트(사진) 최고경영자(CEO)는 지난주 일생에서 가장 긴 한 주를 보냈다. 뉴욕과 워싱턴을 수도 없이 오가며 정부 관료와 의회 의원을 설득해야 했다. 재무부 관료를 붙잡고 “우리를 포기하지 말아 달라. 한 번만 더 기회를 달라”고 매달리기도 했다고 월스트리트 저널(WSJ)은 전했다.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사태가 불거지기 전까지만 해도 씨티그룹의 위세는 대단했다. 1998년에는 한국의 외채 만기 연장 협상을 주도했다. 당시 재무장관을 지낸 로버트 루빈을 이사회 의장으로 스카우트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난달 27일 미국 정부가 씨티은행 우선주를 최대 250억 달러까지 보통주로 전환하기로 함에 따라 씨티그룹의 역사도 새로 쓰이게 됐다. 정부 지분이 최고 40%에 이르게 돼 사실상 국유화되기 때문이다.

◆‘대마불사’가 만든 함정=98년 씨티은행의 모회사 씨티코프와 보험·증권 계열사를 거느린 트래블러스의 합병 선언은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당시만 해도 미국은 은행과 증권사의 동거를 허용치 않았다. 은행이 증권업에 손댄 뒤 고객 예금으로 위험한 주식·채권에 투자했다가 망한 게 29년 대공황의 원인 중 하나라고 판단한 미국 의회가 33년 글래스-스티걸 법을 제정해 은행과 증권 사이에 칸막이를 쳐 놓은 것이다.

65년이나 유지된 이 규제가 씨티코프·트래블러스의 합병 선언으로 도마에 올랐다. 논란 끝에 미국 의회는 99년 그램-리치-브릴리 법을 만들어 글래스-스티걸 법을 사실상 폐기했다. 그 결과 탄생한 씨티그룹은 전 세계에 은행·보험·증권을 아우르는 메가뱅크(Mega Bank) 바람을 일으켰다. 초대형 금융그룹이 속속 탄생했다. 이들은 위험천만한 투자은행 업무에도 앞다퉈 진출했다. 덩치가 커진 덕에 아시아 외환위기, 러시아 모라토리엄, 닷컴 거품 붕괴 같은 충격도 이겨 낼 수 있게 되자 메가뱅크는 더 대담해졌다. 그러나 그게 화근이었다. 대마불사의 주술에 걸려 서브프라임 모기지에 몰입했다가 씨티그룹마저 국유화되는 운명을 맞았다.

◆씨티그룹 어떻게 되나=이번 조치로 씨티그룹에 정부 돈이 추가로 지원되는 건 아니다. 다만 우선주는 빚이지만 보통주는 지분이어서 씨티그룹으로선 장부상 자본이 늘어나는 효과를 본다. 정부가 주인이 됐으니 최소한 망하게 내버려 두지는 않을 거라는 시장의 믿음도 얻게 됐다.

그러나 대가는 혹독하다. 당장 해외 영업에 상당한 제약을 받을 가능성이 크다. 씨티그룹이 애지중지하고 있는 멕시코 2위 은행 바나멕스부터 팔아야 할지 모른다. 멕시코는 외국 정부가 10% 이상 지분을 소유한 은행이 국내에서 영업하는 것을 허용치 않고 있기 때문이다. 씨티그룹 측은 최악의 경우 미국 정부를 통해 외교적인 해결책을 찾아보겠다는 입장이지만 멕시코 정부가 호락호락 씨티그룹 입장을 봐줄지는 미지수다. 폴란드를 비롯한 다른 나라에도 이와 유사한 규제가 있다.

정부·의회의 ‘훈수’와 규제도 받아야 한다. 씨티그룹은 앞으로 재무부는 물론 연방준비은행·통화감독청(OCC)·예금보험공사(FDIC)에 정기적으로 경영 상황을 보고해야 한다. 이미 3차 정부 지원 조건으로 15명의 이사회 구성원을 씨티그룹과 인연이 없는 독립적 인물로 교체하라는 지시도 받아 놓고 있다.

◆국유화 확산 전망=정부가 다른 은행에도 씨티그룹 국유화 모델을 적용해 우선주를 보통주로 전환할 가능성이 큰 것으로 월가는 보고 있다. 이렇게 되면 발행 주식 수가 늘면서 주당 가치가 떨어지게 된다. 이 때문에 씨티그룹의 국유화 소식이 전해진 지난달 27일 뉴욕증시의 금융주가 일제히 곤두박질쳤다.

한편 로이터통신은 지난달 28일 정부가 우선주를 매입하는 방식으로 미국 최대 보험사인 AIG를 추가 지원키로 했다고 보도했다. AIG는 다음 국유화 대상으로 지목되고 있다. 정부는 일단 국유화를 하지 않고 300억 달러의 자금을 더 투입하기로 한 것이다.

정경민·김필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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