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가 뽑은 작가의 책 ⑧ 강정 → 이응준 『약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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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강정에게서 단아한 목소리로 낭송함직한 시를 떠올리면 헛일이다. 그는 시를 록음악으로 불러젖히고, 비주류 문화를 사랑하는 ‘나쁜 취향’을 가진 사내다. [중앙포토]

봄이다. 참 무정하게도 바람의 온도가 마음의 적정치보다 상승하고 중천의 해가 싯누렇다. 산뜻한 봄을 맞(으려 하)는 많은 분께 송구스럽지만, 내 안에 담긴 해묵은 울혈 말고 작금의 내가 털어놓을 수 있는 이야기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우주적이라 ‘감히’ 말하고 싶다). 치졸한 감상이라 해도 나로선 불가항력이다.

오래 눈감고 방치해 뒀던 어떤 통증을 삭풍에 짓찢고 벼리다가 나는 (또 감히!) 서른아홉이 되었다. 그러면서 어리석게도 ‘청춘’이란 단어를 곱씹는다. 그런데 응당 맑고 청량해야 할 그 단어가 사뭇 어둡다. 긴 터널의 끝이 보이지 않는다.

그 기나긴 터널의 한복판에서 2년 전쯤 듬성등성 읽었던 이응준의 소설집 『약혼』(2006·문학동네)을 다시 집어들었다. 그 이전, 대략 10여 년 동안 그가 책으로 묶어낸 대부분의 작품을 읽었고, 그것들에게서 받은 모종의 선입견과 섣부른 인상이 남아있던 터라 당시의 독서는 짐짓 관성적이고 소모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는 대개 마음이 어둡고 그로 인해 세계와 타인들로부터 상처받은 인물들이 영혼의 선혈을 토해내는 이야기들을 줄창 써댔다. 삶의 한 순간에 세계의 심연으로 곤두박질친 인물들의 이야기는 그 처연함이 주는 역설적 미감과 성난 슬픔 탓에 공감할 순 있으나 선뜻 손 내밀고 다가가기엔 버거운 데가 있었다. 그의 소설들은 (제목과 달리) 삶과 ‘파혼’한 자들의 힘겨운 영혼 순례기이다.

사람이란 대개 남의 상처에 제 살 맞대는 걸 저어하기 마련이다. 나는 어쩌면 내가 품고 있는 상처가 들통날까봐(청춘이 일장춘몽으로 묘연해지던 지난 10여 년 동안) 겁을 냈던 건지 모른다. 아마도 나는 그의 소설을 눈꺼풀로 읽었던 모양이다.

그러다가 정작 스스로가 감췄던 마음의 병증이 세상 곳곳에서 적나라해지자 그의 소설이 내 뻑뻑한 눈꺼풀을 까뒤집고 들어와 ‘이게 바로 너의 삶이지 않느냐’며 매섭게 질타한다. 진작 겪었어야 할 삶의 홍역에 뒤늦게 시달리며 나는 온몸으로 그의 소설을 앓았다. 그 덕에 마음 헐벗고 피 흘리던 겨울이 더 춥고, 더 신랄했다. 내가 원래 아픈 인간이었다는 걸 전면적으로 알게 되는 데 사춘기를 넘기고도 20년이 더 걸린 셈이다.

나이를 먹고, 그 만큼의 노력과 성실로 뭔가를 이루고, 조금은 높거나 번다한 소요들로부터 비껴난 곳에서 삶을 굽어보는 걸 지혜라 일컬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응준의 말마따나 “늙어 세상의 이치를 통달해 요망해질 수는 없지 않겠는가”(‘작가의 말’에서). 적어도 자신 안에 뜨거운 피가 때로 역류하고 솟구쳐 삶의 빛깔이 무시로 변화하는 걸 체감하는 자라면 상처 깊숙이 손을 담가 볼 일이다. 그러다가 어느 날, 긴 어둠 끝에 햇빛이 소스라쳐 몰려와 터져나오는 울음은 세상이 감춘 둥근 미소의 또 다른 일면일 것이다.

◆약혼=“내가 사랑을 멸시하는 것은, 그것이 쉽게 썩어 문드러져 미움의 거름이 되기 때문이다.” 사랑의 충동인 에로스, 죽음과 자기 파괴의 충동 타나토스가 뒤엉킨 청춘의 이야기 9편이 담겼다. 만 19세에 시인으로 먼저 등단한 이응준(39) 작가의 네 번째 소설집이다.

◆강정=감각의 시인이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 몸을 열어 세상을 호흡하는 시를 써낸다. 1971년 부산에서 태어나 추계예술대학교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92년 ‘현대시세계’로 등단했다. 시집 『처형극장』『들려주려니 말이라 했지만』『키스』, 산문집 『루트와 코드』『나쁜 취향』이 있다. 록그룹 ‘침소밴드’ 리드보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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