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념인생] 부산 민학회 주경업 회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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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경업 회장이 자성대 내 영가대 건축 양식을 설명하고 있다. 송봉근 기자

부산민학회 주경업(65) 회장은 "부산은 문화 불모지"라는 말을 들으면 화를 낸다. "부산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라고 반문한다. 그의 입에서는 동래향교.정공단.자성대.초량왜관 등이 무엇인지, 부산 역사에서 무슨 의미가 있는지 줄줄 나온다. 그리고 "동래를 연구해 보고 수영에서 전승되고 있는 전통문화에 관심을 가져보라"고 충고한다.

그를 아는 사람들은 그를 '부산문화 파수꾼''부산 문화.역사 해설가'라고 부른다.그의 입을 통해 나오는 부산 역사는 생기가 있고, 문화는 숨결이 느껴진다.

"부산의 정체성을 찾아야 합니다.부산 사람에게 면면히 흘러온 정신을 찾아내 고양시켜야 합니다."

그는 "부산의 정신이 여기 저기 산만하게 흩어져 있어 안타깝다"며 "지역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문화와 역사를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고 강조하는 사람이다.

그는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찾아내고 이어가기 위해 1994년 부산민학회를 만들었다. 그리고 10년 동안 회장을 맡아 민학회 답사에 몸바쳤다. 그동안 250차례 역사.문화답사를 했다.

답사 장소를 정한 뒤 사나흘 현장을 찾아 자료를 챙기고 돌아와 10권 이상의 관련 서적을 읽고 수십쪽의 자료집을 만든다.

원고를 쓰는데만 10일 이상 걸린다. 사진과 지도를 곁들여야 하고, 기존 자료의 잘못된 내용을 바로 잡아야 하고 새로운 내용을 추가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만든 자료집은 웬만한 민속.문화재 자료집보다 내용이 깊고 풍부하다는 평을 듣고 있다.

이들 자료집을 읽고 현장서 설명을 듣는 회원들은 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문화.역사에 대한 회원들의 지식과 인식도 자연히 깊어갔고, 회원도 늘었다. 주 회장의 보람도 커갔다.

답사자료집을 만들면서 그도 많은 공부를 했다. 전국의 주요 문화재의 특징과 관련 인물, 생성 연대를 줄줄 욀 수 있게 됐다. 덕분에 '걸어 다니는 문화사전'이라는 별명까지 얻은 그의 전공은 미술이다.

17일부터 부산문화회관서 열리는 부산미협회원전과 피카소화랑서 열리는 '부산회화전'에 출품했다. 오는 10월 28일부터 13번째 개인전을 열 준비도 하고 있다.

그는 그림에 전념하기 위해 1983년 3월 다니던 학교(통영여중)를 사직했다.

부산사범대학을 나온 그는 경남여중 등에서 미술을 가르쳤다. 당시 음악 관련 논문으로 장학사가 되기도 했다.

중학교(경남 진해 웅천중) 시절 교회 합창단 지휘를 맡았을 정도로 음악에도 소질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림을 제대로 그리지 못했다. 어릴적 염소당번을 했던 기억을 되살려 염소와 어린아이 그림을 주로 그렸지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머리 속이 백지였으니 무슨 그림을 어떻게, 왜 그려야 하는지 캄캄했지요."

공부하기로 작정한 그는 전국 유명 산과 사찰, 공연장을 찾아다녔다.

짧게는 사나흘, 길게는 1개월 이상 집을 비웠다.

경주 남산에서 처음 본 마애불의 온화한 미소에 반해 전국의 마애불을 찾아다니며 그리고 또 그렸다.

1990년 마애불 작품 전시회를 개최, 호평을 받기도 했다. 경주 석굴암에서 1개월 이상 지내며 부처만 그리기도 했다.

젊었을 때 듣기 싫고 맡기 싫던 목탁소리와 향내가 좋아지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당시 그는 지하철을 타고 가면서도 그림을 그렸다. 앞에 서 있는 사람의 얼굴을 그리다 욕 먹기 일쑤였다. 그런 그를 주변 사람들은 '그림 귀신'씌었다고 놀렸다.

그는 최근엔 전국의 전통 무용 발표회장은 어디든지 찾아 나녔다. 전통 음악이나 새로운 장르의 음악 발표회장도 빼놓지 않는다.

요즘은 그곳서 보고 들은 것들은 화폭에 옮기고 있다.

주로 전통 무용의 춤사위와 전통 악기가 등장한다.

그는 그림을 먹물을 넣은 펜으로 그린다.

유화도 그렸지만 덧칠하는 것이 싫다고 했다. 먹선은 투명하고 정신을 잘 반영할 수 있어 좋다는 것이다.

"가는 펜으로 정신의 베를 짜듯 그림을 그린다"는 그는 "'마치 그림 속의 춤사위가 살아 움직이고 악기가 소리를 내는 것 같다'는 평을 듣는 그림 1점만 그릴 수 있다면 좋겠다"고 했다.

그에게 답사는 그림 공부를 위한 한 방편이었다. 하지만 답사는 그에게 많은 자산을 가져다 주었다.

"답사를 통해 우리 문화와 역사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했다"는 그는 "역사와 문화를 정확히 알아야 미래를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고 비전을 제시할 수 있다"는 신념에 산다.

일가(一家)를 이루려면 미쳐야 한다는 것도 알았다. "신명이 있어야 성공한다"는 얘기를 자주하는 그다.

우리 문화와 역사에 대한 스스로의 지평을 더 넓히기 위해 그는 죽는 날까지 발품 파는 일에 신명을 바칠 각오다.

그는 여행에서 돌아오면 쉬기 보다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길 좋아한다.

누군가가 "그렇게 집을 비워도 되느냐"고 물으면 "역마살 낀 팔자대로 사는 셈"이라고 "허허" 웃는 그다. 그는 "팔자대로 살 수 있는 것은 집사람 덕분"이라고 말했다.

주 회장의 여행담을 가장 열심히 들어주는 사람이 식당을 경영하는 부인 강정자씨다.

강진권 기자 <jkkang@joongang.co.kr>
사진=송봉근 기자 <bksong@joongang.co.kr>

◆부산민학회= 1994년 4월 29일 창립됐다. 서울에 이어 전국에서 두 번째였다. 일상인들이 우리 역사와 문화를 생활 속에서 찾아내 이어가자는 모임이다.

지난 주말엔 84번째 공동 답사로 경북 상주 일원을 다녀왔다.'한려수도 거제도에 서린 역사현장과 천혜의 자연을 찾아서''선암사 선교다리 아래 흐르는 봄빛을 찾아서''옥산서원과 양동마을에서 만난 우리집'등 전국의 유적.유물.강산이 답사 대상이었다.'부산 역사문화 가족 나들이, 부산을 배웁시다'라는 제목의 부산 답사는 1997년 이후 33차례나 했다. 답사때마다 자료집을 냈다. 자료집(사진)을 3권으로 묶어 발간하기도 했다.

2000년 5월엔 '정말 부산을 사랑한 사람들'을, 지난 4월엔 '역사와 문화 현장 체험, 부산을 배웁시다'를 펴냈다. 이 책은 지역 역사의 현장 속에 녹아있는 선조의 숨결을 드러내도록 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창립 당시 50여명이던 회원이 160여명으로 늘었다. 회원은 예술인, 공무원, 교수, 회계사, 은행원 등 다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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