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수로 착공 현장 리포트]리셉션서 남북한 대표단 정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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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금호지구 = 경수로공동취재단]한반도 평화정착의 염원을 담고 추진돼온 대북 경수로 착공의 발파음이 함남 금호지구에 울려퍼졌다.

가랑비가 오랜 가뭄에 시달려온 북한땅을 촉촉히 적시는 가운데 3백여명의 관계자가 참석한 착공식은 경수로건설을 위한 첫삽질의 역사적 의미 때문인지 다소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거행됐다.

…착공식은 장선섭 (張瑄燮) 경수로기획단장등의 대표연설에 이은 발파식에 이르러 분위기가 절정에 달했다.

스티븐 보스워스 사무총장을 비롯한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 (KEDO) 총장단과 이종훈 (李宗勳) 한전사장.북한대표등 10명이 발파 스위치를 누르자 원자로가 들어서는 어인봉 정상에는 폭음과 함께 오색의 화약연기가 피어올랐다.

뒤이어 30여발의 축포 소리가 금호지구 하늘로 울려퍼지자 참석자들은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환호했다.

…북측 대표 허종 (許鐘) 외교부 순회대사는 연설중 경수로사업과 남북관계의 연관성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고 북.미관계 틀속에서만 착공의 의미를 찾는 모습. 그는 공사부지 참관 행사에는 불참한 채 연설만 끝낸 뒤 서둘러 벤츠승용차 편으로 현장을 빠져나갔다.

이에 반해 우리측 張단장은 "남과 북의 건설인력이 같은 목적을 갖고 오랫동안 같이 일한 전례는 분단이래 처음 있는 일" 이라며 경수로사업이 남북관계에 적지않게 기여할 것이라고 강조. 한편 북한은 경수로 착공식 소식을 논평없이 짤막하게 보도했다.

관영 중앙통신은 "조.미 기본합의문에 따라 미국이 북한에 제공하는 경수로 착공식이 금호지구에서 진행됐다" 면서 특히 클린턴 미 대통령이 메시지를 통해 "합의문 이행은 미국 대외정책의 기본이며 이를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할 것" 이라고 말한 대목을 부각해 소개했다.

…KEDO 대표단은 착공식을 마친뒤 오후6시부터 2시간동안 경수로 기술자 숙소인 '게스트 하우스' 근처 평양 옥류관 금호지구 분점에서 許대사등 북측대표단을 초청, 착공기념 리셉션을 개최. 리셉션에는 남북한 대표단과 KEDO 관계자.기자단이 어울려 이야기를 나누는등 화기애애한 분위기. 착공식의 감흥과 석별의 정이 교차한 가운데 19일 밤늦게까지 진행된 만찬을 마친뒤 한국 관계자.취재진과 KEDO 대표단은 잠자리에 들기 위해 양화항에 정박한 한나라호 객실로 귀환. 그러나 북한 영내라는 긴장감과 역사적인 착공식을 목도했다는 흥분감 때문인지 쉽게 잠을 이루지 못하고 새벽녘까지 착공식을 둘러싼 이야기꽃을 피웠다.

…이에 앞서 KEDO 대표단과 취재진등을 태운 한나라호는 19일 오전7시10분쯤 신포 앞바다에 있는 도선안내지점 (파일럿 스테이션)에 도착, 사전합의에 따라 선미에 게양된 태극기를 하강. 張단장은 "여기서 태극기를 내리게 돼 서글픔이 앞선다" 면서 "오늘은 북한과의 합의에 따라 태극기를 잠시 내리지만 앞으로 한반도에서 태극기가 영원히 내려지지 않는 날이 오기를 간절히 바란다" 고 말했다.

…북측 해역에 접어들자 수로 안내인과 통행검사소 직원등 7~8명이 탄 북한 선박이 한나라호로 접근. 인공기를 게양한 '0 - 수 - 3963' 호의 선장과 검역의사 2명, 세관원 3명은 10분뒤 한나라호에 승선, 방북자들의 인적사항을 확인한 뒤 통신시설등을 봉인. 북측 검역의사 2명은 손목시계를 보며 대표단 전원의 맥박수를 확인하고 체온을 쟀다.

도선 안내지점에서 접안절차를 모두 마친 한나라호는 오전9시30분쯤 양화항으로 이동을 시작, 10시20분쯤 양화항에 접안. 부두에서 좀 먼곳에서는 북한 노동자들이 선박을 수리하거나 한나라호를 구경하는 모습이 간혹 보였고 짐을 실어나르는 우마차가 눈에 띄었다.

지난 4월 방북했던 KEDO 관계자는 "지난번에는 이처럼 인적이 드물지 않았다" 면서 "북한당국이 KEDO 대표단및 일반주민과의 접촉가능성에 상당히 신경을 쓴 것같다" 고 풀이.

…양화항 입국소 매점에서는 여성 판매원과 KEDO 대표단.취재진의 만남이 이뤄졌는데 이들 판매원은 남한.외국인들과의 접촉이 낯설지 않은지 질문에 밝은 웃음을 띠며 친절하게 대답. 특히 조혜영이라는 판매원은 "북한남자가 좋은가 아니면 남한 남자가 좋은가" 라는 취재진의 짓궂은 질문에 "조선민족이라면 다 좋지요" 라고 대답. 그녀는 봉급이 얼마냐는 질문에 "무슨 말인지 잘 못알아듣겠다" 고 스스럼없이 대했다.

입국소 매점에서는 북한 술과 상품뿐만 아니라 코카콜라등 외국 물품도 상당수 판매되고 있어 북한의 치외법권지대인 '경수로 특구' 의 위상을 대변. …양화항에서 만난 북한 세관원은 "경수로사업에 남한이 많은 돈을 내고 있다는 것을 일반주민들도 다 알고 있다" 고 말했으나 한적 (韓赤) 을 통한 대북지원은 금시초문이라는 표정. 도로는 최근 KEDO 용역에 따라 보수했음에도 불구하고 전날부터 내린 비로 진흙탕 길을 이룬 곳이 많았다.

북측 안내원들은 한국 취재진들이 양화항 주변과 도로변의 옥수수.민가등을 촬영하려 하자 "경수로에 관련된 것만 취재하라" 며 고압적 태도로 제지. 산은 나무들이 거의 없는 민둥산이었으며 산꼭대기 부근까지 심은 옥수수는 심한 가뭄으로 인해 제대로 자라지 못한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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