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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우덕의 13억 경제학] ‘손오공의 공격’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난 주 저희 신문에 썼던 칼럼입니다. 사진을 추가했습니다.
블로그는 이번 주 개점휴업입니다.
현장 충전한 뒤 더 깊은 내용으로 뵙겠습니다.

중국인들이 즐기는 경극(京劇)에는 다양한 캐릭터가 등장한다. 이 중 ‘화단(花旦)’이라는 여자 배역이 있다. 그는 무대 이곳저곳을 돌며 갖은 교태로 아양을 떤다. 화단은 걸음걸이에서 특색이 드러난다. 그는 언제나 종종걸음으로 움직일 뿐 절대 뛰지 않는다.

경극 ‘서유기’에 등장하는 손오공은 화단과는 정반대 성격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삼장법사를 뫼시는 바로 그 손오공이다. 손오공은 하늘로 치솟고, 연기 속으로 사라지고, 무대 안팎을 활보하며 적들을 괴롭힌다. 변신에도 능하다.

홍콩의 유명 정치평론가이자 ‘아주주간(亞洲週刊)’ 편집장인 추리번(邱立本)은 중국 정치·사회를 ‘화단의 정치와 손오공 사회’로 표현한다. 정치 개혁에 과감하게 나서지 못하는 공산당을 종종걸음 치는 화단에 비유했다. 그가 지칭한 손오공은 네티즌이다. 천궁(天宮)을 휘저으며 변화무쌍 움직이는 손오공처럼 중국 네티즌은 인터넷 공간에 출몰해 권위에 도전하고, 부정부패를 폭로한다.

화단과 손오공이 중국 정치무대에서 벌이는 공연을 엿보자.

지난 9일 불탄 베이징 CC-TV 신사옥 본사 부속 건물은 공연의 거대한 세트장이었다. 불이 나자 손오공들이 대거 무대 위로 튀어 올랐다. 그들은 인터넷을 통해 화재를 세상에 처음 알렸고, 타 들어 가는 건물 사진을 시시각각 전했다. CC-TV를 비방하는 댓글과 블로그가 이어졌다. “국민의 혈세로 사상 최대의 폭죽을 터뜨렸다” “사람 된 도리라면 CC-TV처럼 행동하지 말라”는 등의 비난이 난무했다. 하늘에서 화마(火魔)가 내려와 CC-TV 건물을 공격하는 컴퓨터 그래픽이 퍼지기도 했다. 당국이 인터넷 ‘관리’에 나섰음에도 화재 10여 일이 지난 지금도 공격은 이어지고 있다. 중국의 손오공 수(인터넷 가입자)는 현재 약 3억 명. 이들이 운영하고 있는 블로그만 1억6200만 개에 이른다. 어마어마한 규모의 엑스트라다.

손오공들의 표현에는 거침이 없다. 그들은 “공산당의 얼굴이자 인민의 방송이라는 CC-TV가 인민을 배반했다”고 성토한다. ‘다스(大師)’라는 이름의 네티즌은 포털사이트 블로그를 통해 “기회만 있으면 인민들에게 준법을 강조했던 그들이 스스로 법을 어겼다”며 “누가 CC-TV와 당을 믿겠느냐”고 비난했다. 언론 통제를 비웃고, 보도의 자유를 외치는 목소리도 높다. 국영 방송사에 대한 공격이 공산당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지난해 12월 10일 공포된 ‘08헌장’을 대중에 퍼뜨린 것도 이들 손오공이었다. 지식인 303명이 서명한 ‘08헌장’은 공산당을 ‘집정집단(執政集團)’으로 묘사하는 등 당을 겨냥한 선전포고문을 방불케 했다. 네티즌들은 언론·출판·결사의 자유보장, 인권 보장, 삼권분립 등 정치민주화를 요구하는 헌장 내용을 인터넷에 퍼 날랐다. 당국의 집요한 방해에도 불구하고 헌장 서명자는 e-메일을 통해 확산, 이미 8000명을 넘은 것으로 전해진다.

물론 공산당 체제가 흩어진 손오공들의 공격에 쉽게 흔들리지는 않을 것이다. ‘공산당이 없으면 신중국도 없다(沒有共産黨, 沒有新中國)’는 말은 정치구호가 아닌 현실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중국인들은 ‘당의 강력한 지도력이 경제 번영을 가능케 했다’는 데 이견을 달지 않는다. 그러나 손오공들의 움직임은 경제위기·부정부패·빈부격차 등 사회문제와 결합되면서 조직화되고, 폭발력을 가질 수 있다는 데 문제가 있다. 저장(浙江)에서 최근 농민공(농촌 출신 도시 근로자) 주도의 시위가 벌어지는 등 사회불안이 고조되고 있어 당을 긴장시키고 있다.

중국 정치무대에는 ‘예약된 공연’이 적지 않다. 티베트 봉기 50주년(3월 10일), 5·4운동 90주년(5월 4일), 천안문사태 20주년(6월 4일) 등 손오공을 자극할 수 있는 기념일이 속속 다가온다. CC-TV 화재에서 그랬듯 무대 뒤 손오공은 사건만 터지면 언제든지 뛰쳐나와 여의봉을 휘두를 태세다. 종종걸음 치는 정치무대 속 화단의 마음은 다급하기만 하다.

어느새 관중의 손에도 땀이 쥐어진다.

우디


한우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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