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링’에선 이기고 지는 건 중요치 않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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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타의 컴백과 곡절 많은 재기담을 선호하는 아카데미협회 회원들의 성향이 올해도 반영된다면, 22일(현지시간) 열리는 제81회 아카데미상 남우주연상 트로피를 가져갈 사람은 아마도 ‘더 레슬러’의 미키 루크(사진)가 될 것이다. 한물 간 프로레슬러의 모든 것을 건 한 판 승부가, 1980년대 대표적 섹시스타였으나 성형수술 후유증과 알코올 중독, 폭력 전과 등으로 망가져버린 배우의 개인사와 절묘할 정도로 겹치기 때문이다. 오버랩의 정도가 어떤 부분에서는 너무 심해서, 그의 레슬러 연기가 정말 뛰어난 건지 아니면 자신의 드라마틱한 삶을 그냥 보여주기만 하는데도 감정이입이 절로 되는 것인지조차 모호해질 정도다. 그래서 일각에서는 루크의 진정한 부활 여부는 ‘더 레슬러’ 이후를 봐야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어쨌거나 좋다. 오빠는 돌아왔다. ‘나인 하프 위크’ ‘보디 히트’에서 작렬하던 성적 매력은 온데간데없음에도 불구하고 평단은 돌아온 오빠에게 더 이상의 수식어가 부족할 정도의 찬사를 연일 바치고 있다. 이미 지난해 베니스국제영화제는 ‘더 레슬러’에 최고상인 황금사자상을 주면서 “황금사자상 수상작에게 연기상을 같이 주지 않는다는 영화제 원칙을 재고해 봐야 한다”며 돌아온 탕아의 연기에 별 다섯 개를 달아줬다.

‘더 레슬러’의 대런 아로노프스키 감독(98년 초저예산영화 ‘파이’로 깜짝등장한 선댄스 키드)은 다수의 프로레슬러들이 화려한 링에서의 면모와 달리 가정 파탄과 약물중독 등 아픈 개인사가 있다는 데 주목했다. 그래서 영화는 승부 자체를 박진감 넘치게 그리는 전형적인 방식보다는 좀 더 복합적인 시각을 취한다.

퇴물 레슬러 랜디 램(미키 루크)은 액션 피겨까지 제작된 왕년의 인기 선수였지만 지금은 생계를 잇기 위해 동네 수퍼 정육점에서 햄과 샐러드를 판다. 가난한 중년남자의 일상은 고독하고 초라하다. 아빠로부터 버림받았다고 생각하는 딸(레이첼 우드)은 여간해서 가까워지기 쉽지 않다. 스트립 댄서 캐시디(마리사 토메이)에게 마음의 위안을 얻지만 캐시디도 “고객과는 교제하지 않는다”며 거리를 둔다.

일상의 지리멸렬함을 곱씹던 그에게 최대의 숙적 아야톨라가 경기를 제안해 오고, 그는 위험할 지경에 이른 심장 문제를 애써 무시한 채 링에 오른다. 감독은 쓰러진 아야톨라 위로 최후의 일격을 가하는 랜디 램의 마지막을 일부러 보여주지 않고 엔딩 크레딧을 올린다. 한 프로레슬러의 다큐 같은 인상을 주는 이 영화는 끝까지 드라마틱하고 전형적인 문법을 피하려 애쓴다. 그래서 극적 재미는 다소 떨어질지 몰라도 영화가 끝난 뒤의 여운은 상당하다. 자기에게 주어진 삶을 어찌됐건 좌충우돌 살아보려 애썼던 이 남자는 마지막 경기에서 이겼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어차피 상관없다. 이겼더라도 램의 인생이 크게 나아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사실을 이 남자의 갈 데까지 간 ‘막장인생’을 지켜본 관객들이라면 이미 눈치챘을 테니 말이다. 3월 5일 개봉. 18세 이상 관람가.

기선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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