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 정치 싫다고 정당 무력화하면 더 큰일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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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준(70·사진) 전 환경부 장관에게는 ‘책사’ ‘장자방’ 같은 수식어가 늘 붙어 다닌다. 이회창·박근혜·최병렬씨 등 과거 한나라당 총재나 대표가 대선·총선 등 중요한 정치적 이벤트를 앞두고 총체적 전략 수립을 단골로 맡길 만큼 그는 여권의 대표적 지략가로 통한다. 2000년 16대 총선에서 기획단장을 맡아 김윤환·이기택·신상우씨 같은 거물 정치인들을 낙마시킨 ‘원조’ 개혁공천 카드도, 2004년 17대 총선에서 거세게 몰아쳤던 탄핵 역풍을 선대위 부본부장으로서 ‘무조건 사과’와 ‘거여 견제론’으로 막아낸 전략도 그의 머리에서 나왔다.

취임 1주년을 맞은 이명박 대통령에 대해 윤 전 장관은 어떤 중간평가를 내리고 있을까. 2004년 당적까지 버리고 현실정치를 떠났다며 인터뷰를 한사코 고사하는 그를 20일 서울 여의도 사무실로 찾아갔다. “아무 준비 없이 탄생한 정권” “잃어버린 10년을 말할 자격이 없다” “사적 연고로 이뤄지는 인사” “제동장치가 고장 난 채 비탈길을 굴러가는 자동차” 등 현 정부를 향한 강도 높은 쓴소리가 2시간 내내 계속됐다.

“747·대운하 다음엔 아무것도 없어”
-지난달 30일 국민과의 대화를 봤나.
“시작할 때 좀 봤다. 그런데 그 프로 시청률이 아마 높지 않았을 거다. 이런 위기 상황에서 대통령이 TV 생방송에 나와 특별한 얘기를 한다면 국민이 관심을 갖는 게 당연하다. 근데 왜 안 그랬겠나. 대통령이 뭘 얘기할지 뻔하기 때문이다. 국민이 관심을 안 갖는 건 결국 기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몇 달 전 여론조사긴 한데, 대통령이 국정운영을 잘할 것으로 ‘기대한다’는 응답이 40%, ‘기대하지 않는다’는 응답이 45%더라. 현재의 지지도보다 국민의 기대수치가 참 중요하고 의미 있는 것인데, 앞으로 참 어렵겠다고 생각했다.”

-왜 그렇다고 보나.
“신뢰 상실이다. 이 정권은 너무 준비가 안 된 정권이다. 김대중·노무현 정권을 ‘잃어버린 10년’으로 규정했으면 자기들이 집권한 뒤 새로운 국정방향을 제시하고 정책을 내놓고 국민의 동의를 구하는 일들을 신속하게 진행해야 했는데 지난 1년간 기억나는 게 있는가. 747이 어려워지고 대운하가 망가지니까 그 다음엔 아무것도 없다. 스스로 혼돈을 자초하고 자신들 정권의 성격을 과도기적 정부로 규정하는 우를 범하고 있다.”

예상보다 비판의 강도가 셌다. 인터뷰 내내 그는 이 대통령과 한나라당이 집권에만 골몰했을 뿐 국정운영에 대한 준비가 크게 부족했다는 점을 조목조목 지적했다.

“여의도 정치에 대한 혐오는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모두 갖고 있다. 하지만 국정의 최고 책임자라면 거기서 그쳐서는 안 된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정당이 맡을 수밖에 없는 역할과 기능이 있는데, 여의도 정치가 싫다고 정당을 지금처럼 무력화하면 더 큰일이 난다. 최근에도 국회의원이 청와대와 다른 소리를 냈다가 청와대가 언짢게 반응하니까 쑥 들어간 일이 여러 차례 있지 않았나.”

‘초식 공룡’이란 비판을 받는 한나라당에 대한 의견을 물어도 대답은 이내 대통령 비판으로 연결됐다.

“정권 출범 두 달 뒤 총선이 있다는 건 갑자기 결정된 게 아니다. 이미 오래전부터 예정돼 있던 것이다. 그렇다면 대선과 총선 준비를 함께 했어야 했다. 총선은 공천이 핵심이다. 재임 5년간 어떤 개혁을 할지 계획하고 그것을 뒷받침할 세력을 만드는 게 18대 총선 아니었나. 하지만 한나라당이 그렇게 공천했나. 별 해괴한 일이 많았다. 박희태 대표를 공천에서 떨어뜨린 건 뭐고, 몇 달 뒤 당 대표를 시킨 건 또 뭔가. 도대체 국민에게 설명한 적이 없다. 정당의 기능과 역할에 대한 이 대통령의 이해 부족이 지금의 한나라당을 저 지경으로 무력화한 것이다.”

-박근혜 전 대표의 비협조도 한나라당 무력화의 이유 아닐까.
“글쎄. 국정운영 방식에 대한 두 분의 생각이 많이 다른 것 같은데…. 이 대통령이 박 전 대표를 ‘국정의 동반자’라고 한 말이 진심이었다면 서로 다른 생각을 조율하기 위해 진지하게 노력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그런 게 일절 없었다. 박 전 대표 입장에서는 자기 생각은 많이 다른데 그런 걸 자꾸 표출하면 분란으로 비치니까 가만 있게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박 전 대표만 나무랄 수는 없는 일이다.”

“현 정부에서 날 찾는 일은 없을 것”
촛불로 나라가 시끄럽던 지난해 6월 윤 전 장관이 류우익 전 대통령실장 후임자로 막판까지 검토되다 탈락한 배경에는 이 대통령의 친형인 이상득 의원이 있다는 설이 정치권에 파다했다. 2000년 ‘개혁공천’ 당시 윤 전 장관이 공천 배제 대상이던 ‘민정계 중진의원’에 이 의원을 포함시키려 했고, 이때의 앙금이 아직 남아 있다는 것이다.

“납득이 안 간다. 아마 아닐 것이다. 당시 이 의원에 대한 공천 배제 주장이 일각에서 있었던 것은 기억한다. 하지만 그때는 김윤환·이기택씨 등 거물 중진 몇 명만 바꾸고 나머지 분들은 특별한 사유가 없으면 그냥 가는 분위기였다.”

-현 정부에서 부른다면.
“지지난해 대선을 앞두고 이 후보 요청으로 5∼6차례 만났다. 그때 ‘서로 살아온 세계가 다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다른 문화 속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가까이하기 어렵겠다고 느꼈다. 그래서 지난해 대통령실장 후보로 거명될 때도 절대 그런 일 없을 거라고 장담했다. 이 대통령처럼 사적 연고를 중시하는 분이 당선에 아무런 역할도 안 한 나를 찾는 일은 없을 테니까.”

-만나서 무슨 얘기를 했나.
“선거에 대한 자문을 해 왔다. 대선 막바지엔 인수위와 청와대 비서실 구성에 대해 묻더라. 그때 내가 얘기한 게 미래의 행정수요를 예측해 정부 골격을 다시 짜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때 이미 대통령은 작은 정부라는 물리적 규모에만 관심이 쏠려 있었고 노무현 정부 때보다 장관 한 명, 수석 한 명이라도 줄여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다. 정부 부처나 청와대를 무리하게 통폐합한 것도 그런 생각에서 비롯된 게 아닌가 싶다.”

대표적인 선거 전략가로 꼽히는 윤 전 장관이 4년 뒤 대선을 어떻게 볼지 궁금했다.
“변화의 속도와 폭이 이렇게 빠르고 깊은 시대에 4년 뒤를 어찌 알겠나. 현재로선 박 전 대표가 상당히 앞서가는 것으로 돼 있지만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아 있다. 과거 이회창 총재처럼 대세론에 일찌감치 안주하면 위험하다. 지지율 성격도 잘 검증해 봐야 한다.”

-무슨 얘긴가.
“후보군을 나열하면서 차기 대통령으로 누가 적당하냐고 묻는다면 박 전 대표가 압도적으로 많이 나온다. 하지만 방법을 달리해 누가 적당한지 이름을 적으라고 하면 박 전 대표의 비율이 떨어질 것이다. 절대적 지지와 상대적 지지를 구별해야 한다는 얘기다. 상대적 지지가 높으면 취약한 것이다. 다른 요인이 생기면 바로 지지율이 빠지기 마련이다. 과거 이회창 대세론이 우세할 때 이회창 이름을 주관식으로 적는 사람이 15%가 안 됐다. 그게 무슨 대세론이냐. 내가 이걸 지적하며 대세론이 허구라고 총재께 말씀드렸다가 어려움 많이 겪었다(웃음).”

-이회창 총재도 다시 나온다고 보나.
“그 양반 마음속에 들어갔다 나올 수도 없는 일이지만 논리적 추론을 해 본다면 그럴 것으로 본다.”

-당선 가능성이 크지 않을 텐데.
“자유선진당 후보로 나갈 생각인지 아닌지는 모르는 거다. 차기 대선 전에 한국 제도권 정치에 지각변동이 있을 것으로 보는 게 상식 아닌가. 그 과정에서 그분의 위상이 달라질 수도 있는 거고….”

“사적 연고만 챙기는 인사 스타일 버려야”
-집권 2년차를 맞는 이 대통령에게 고언(苦言)을 한다면.
“아무리 마음이 급해도 열심히 국민을 설득하고 야당을 설득하며 ‘설득’에 속도를 내야 한다. 무엇보다 지금처럼 사적 연고를 중시하는 인사 스타일은 버려야 한다. 가뜩이나 취약한 정권의 기반이 인사 때문에 더욱 좁혀지고 있는 건 큰 문제다.”

그의 계획을 물어봤다.

“여야 모두 정치게임에만 몰두하니까 국민이 정치와 정치인을 극도로 혐오한다. 학자들은 이를 ‘적대적 공생관계’라 부른다. 그래서 국민은 적대적 공생관계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을 뽑으려 한다. 참신하다는 이유로…. 그러다 보니 검증 안 된 사람을 고르기 십상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도, 이 대통령도 그랬다. 지난 대선은 BBK와 도곡동만으로 치른 선거다. 얼마나 시대정신이 있는지, 민주적 가치가 내면화돼 있는지 따져 본 적이 없다. 다시는 충동구매하듯 국정의 최고 책임자를 뽑아선 안 된다. 이를 위한 국민운동을 해 볼 생각이다.”

윤창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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