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의 부재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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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호 14면

“걱정 말고 다녀와.”
나는 말이 많다. 말하는 것을 좋아해 늘 행동보다 말이 앞선다. 행동은 전혀 그렇지 못한데 말은 그럴듯하게 한다. 이런 것이 다 ‘오랄’알타이어족의 특징이다. 2박3일의 워크숍 때문에 집을 나서며 이런저런 걱정과 당부를 하는 아내에게 나는 큰소리부터 친다. ‘오랄’알타이어족답게.

남편은 모른다

나는 아내가 없는 동안 최대한 늦게 집에 가려고 한다. 여기저기 약속을 잡아 보지만 그런 날일수록 다들 선약이 있다. 게다가 아이들은 아빠가 와 저녁을 차려 줄 때까지 밥을 안 먹겠단다. 나는 별 수 없이 집으로 간다.

아내가 없는 집은 무정부 상태다. 현관을 들어서자 고기 구운 냄새가 진동한다. 아까 아이와 통화할 때 “너는 밥도 하나 못 찾아 먹느냐”며 역정을 냈더니 큰 녀석이 고기를 구워 저녁을 차려 먹은 모양이다. 춥다고 문은 꼭꼭 닫은 채 말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보일러 온도는 지나치게 높게 설정되어 있고, 점심 때 먹은 피자 박스와 반쯤 남은 콜라 병은 방바닥에 그대로 놓여 있고, 휴지와 과자봉지는 분리되지 않은 채 버려져 있다.

개수대에는 설거지할 그릇이 가득하다. 고기를 구웠던 프라이팬 위에는 그릇과 물컵이 아무렇게나 담겨 있다. 폐유를 뒤집어쓴 물고기 꼴을 하고 말이다. 온도를 낮추고, 문과 창을 열고, 피자 박스와 콜라 병을 치우고, 휴지와 과자봉지를 분리하고, 그리고 설거지를 위해 고무장갑을 끼면서 나는 폐유 같은 짜증과 화를 온몸에 뒤집어쓴 채 헐떡댄다.

아내가 집을 비운 사흘 동안 나는 세상에서 가장 절망적인 사람이다. 아내가 없으면 남편은 누구라도 절망적인 사람이 된다. 나는 절망적으로 깨닫는다. 이 모든 일 원래 아내가 다 했던 일이다.

집안의 어떤 물건도 저 스스로 움직이지 않는다. 밥솥이 쌀을 씻어 밥을 앉히거나 냉장고가 스스로 장을 봐 반찬을 만드는 게 아닌 이상 누군가 그 일을 하는 사람이 있는 것이다. 아내가 날마다 그 일을 하기 때문에 남편과 아이들이 밥을 먹고 깨끗한 옷을 입고 먼지를 마시지 않고 살아간다. 그러니까 가족이 살아가는 것은 아내가 ‘살림’을 하기 때문이다.

아내는 없을 때 오히려 있는 사람이다. 있을 때보다 없을 때 더 잘 보이는 사람이다. 아내는 그런 사람이다.
아내가 집에 돌아온 날 나는 아내에게 말한다.
“이번에 느낀 게 많았어. 앞으로 내가 잘할게.”

아내가 피식 웃는다.
“입으로만 잘해요. 반성도 다짐도.”
아내 말이 맞다. 나는 ‘오랄’알타이어족이다.


부부의 일상을 소재로 『대한민국 유부남헌장』과 『남편생태보고서』책을 썼다. 결혼정보회사 듀오에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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