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마음속의 문화유산]24.평시조·편락·춘향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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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필자는 양악 (洋樂) 으로 음악을 시작했다.

슈베르트의 가곡이 주는 음악의 즐거움에 넋을 잃었고 피아노를 배우면서 피아노 소리 그 자체의 아름다움에 매료됐다.

한 세월이 흘렀다.

서양의 현대음악과 함께 국악에도 눈을 뜨기 시작했다.

처음엔 베토벤과 슈베르트의 '음악어법' 인 조성 (調性) 의 생리와는 다른 국악에서 큰 의미를 찾지 못했다.

그러던 내가 국악에서 심오한 의미를 찾게 되자 세상은 변하기 시작했다.

나의 음악관이 근본적으로 바뀐 것이다.

나는 슈베르트 가곡 못지않게 우리의 전통 음악문화 유산을 귀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세상에 내세우고 싶은 '음으로 된 문화유산' 이 하나 둘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특히 '청산리 벽계수야' 로 시작되는 '평시조' , '나무도 바위도' 로 시작되는 '만년장환지곡 (萬年長歡之曲)' 중의 하나인 '편락 (編樂)' , '술상 채리오' 로 시작되는 판소리 '춘향가' 의 한 대목은 나를 심하게 뒤흔들었다.

넋을 잃는다는 말은 그런 말이 있다는 것이지 실제로 그렇게 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나는 좋은 음악 때문에 자주 넋을 잃었다.

그렇다면 양악에 넋을 잃었던 사람이 우리 전통음악에 넋을 잃게 된 경위는 무엇일까. 바람 소리.비 소리.가야금 소리.피아노 소리.사람 목소리…. 소리의 종류는 많다.

인간은 누구나 소리의 특성을 구별할 줄 안다.

청각 장애가 없는 한 인간이면 예외없이 소리를 듣는다.

음악 소리 심리적 특성 지녀 그런데 소리 중에는 특별한 소리가 있다.

쉽게 소리의 특성을 구별할 수 없는 소리가 있다.

'음악 소리' 가 그것이다.

'음악 소리' 는 물리적 소리가 아니다.

심리적 소리다.

관련 문화권의 구성원들만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문화적 소리' 다.

'음악 소리' 를 옳게 듣는다는 것은 '소리' 가 어떤 의미를 운반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는 말이 된다.

건강한 '신체적인 귀' 를 가졌다고 해서 '음악적 의미' 를 구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서양음악을 듣는 귀나 한국 전통음악을 듣는 귀는 같은 귀가 아닌 것이다.

신체적으로는 같은 귀이지만 문화적으로는 같은 귀가 아니다.

'아이고' 라는 물리적 소리가 문화적 소리가 되면 그 의미가 달라진다.

한국어가 되면 '아이고!

(피곤해서 못살겠구나)' , 영어가 되면 'I go (나는 간다)' 와 상관된다.

'가' '나' 다음에는 '다' 가 나온다는 식의 논리, A.B 다음에 C가 나온다는 식의 논리가 다르듯 긴장과 이완 관계의 생성을 위해 사용되는, 음악을 만드는 '음 재료' 의 결합 논리도 다르다.

음악의 이해는 서로 다른 '음 재료' 의 결합논리의 이해가 선행될 때 비로소 가능하다.

겉으로 보면 서로 다른 것 같으나 안을 보면 같은 것이 있다.

긴장과 이완에의 추구욕, 시작과 끝을 설정해 하나의 형식을 가지려는 형식욕 등은 모든 음악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동서고금의 모든 음악이 '같은 현상' 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욕구를 충족시키는 수단, 즉 재료의 속성이 다르기 때문에 얽혀진 결과는 다르게 나타난다.

수단이 으뜸화음과 딸림화음인 관습이 있는가 하면 직선과 곡선인 관습도 있다.

관습은 이외에도 수없이 많다.

시대와 지역에 따라 관습은 언제나 달랐다.

그러니까 외견상 수많은 서로 다른 음악이 지상에 존재하는 것이다.

그속에 한량없는 즐거움이 지상의 모든 음악을 들으면 예외없이 소리가 시간 안에서 흐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흐름은 그냥 흐름이 아니다.

출발점과 목적지가 있는 흐름이다.

으뜸화음과 딸림화음의 맥락 안에서 흐를 때가 있다.

직선적으로 흐를 때가 있고 곡선적으로 흐를 때가 있다.

급히 흐를 때와 천천히 흐를 때가 있다.

예술의 논리는 진공에서 태어나지 않는다.

예술감상의 논리 역시 진공에서 태어나지 않는다.

서양예술의 감상 논리와 전통예술의 감상 논리 역시 다르다.

전통예술 감상법에 마음이 젖어있지 않으면 전통음악의 진미 (眞美) 를 감상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전통예술의 가치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다.

한국인이 한국 전통예술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서양예술 감상법 하나만을 교육받아온 개인적.집단적 역사를 안고 있기 때문이다.

'청산리 벽계수야' 로 시작되는 '평시조' 를 들어보라. '평시조' 라는 문화적 소리를 서양음악을 듣는 식으로 들으면 그냥 '도 도오오' 다음에 '소오올' 이 되고 만다.

그야말로 음악적 정보가 없고 유치하기 짝이 없는 텅빈 헛소리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것을 전통음악을 듣는 방식으로 들으면 도저히 말로 표현할 수 없을만치 한량없는 즐거움, 긴장과 이완의 묘미, 직선과 곡선의 묘한 어울림 등을 맛볼 수 있다.

그렇다면 전통음악을 듣는 방식이란 무엇인가.

한마디로 '음악이 탄생된 문화적 맥락 안에서 듣는다' 는 뜻이다.

'비가 온다' 라는 말과 '비가 운다' 라는 말이 있다.

전자는 생활어, 후자는 시어 (詩語) 다.

'비는 오는 것이지 우는 것이 아니다' 라고 말하는 사람은 시어와 생활어의 기능이 같지 않음을 모른다.

서양음악에서 나타나는 소리와 전통음악에서 나타나는 소리의 기능을 동일시하는 사람은 전통음악을 그것이 탄생된 맥락에서 듣지 못한다.

시어의 맥락 안에서 '비가 운다' 라는 시구를 생각하면 그 뜻이 묘하게 된다.

전통음악을 '그 음악이 탄생된 문화적 맥락 안에서' 들으면 그 뜻 역시 한없이 깊고 다양할 수 있다.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감을 자랑마라/일도창해하면 다시 오기 어려워라/명월이 만공산하니 쉬어간들 어떠리' 세계적 음악학자들 인정 '편락' 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우조가 끝나고 계면조로 접어들 때만이 아니다.

시작부터 끝까지 '세상에 이처럼 기막히는 소리의 연속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감탄스러운 경험을 할 수 있다.

우리의 것이기 때문에 '그냥 칭찬하자' 는 뜻에서 하는 소리가 아니다.

'나무도 바위도 없는 뫼에 매게 휘쫓긴 까톨의 안과 대천 바다 한가운데/일천석 실은 배에 노도 잃고 닻도 끊고 용총도 끊겨 빠지고/바람불어 물결치고 안개 뒤섞여 잦아진 날에 갈길은 천리 만리 남고/사면이 검어 어둑저뭇 천지적막 가치 놀 떴는데/수적 (水賊) 을 만난 도사공의 안과 엊그제 임 여흰 나의 안이사 엇다가 가홀하리요' 시조와 가곡 등 정가 (正歌) 를 청자 (靑瓷)에 비긴다면, 판소리는 질뚝배기다.

서민의 목소리를 가식 (假飾) 없이 담아낸 진솔한 음악이다.

때로는 거칠고 컬컬한 소리가 맑고 고운 소리보다 더 어울리는 것도 판소리만의 매력이다.

판소리 다섯바탕 중에서도 백미 (白眉) 를 꼽으라면 단연 '춘향가' 를 들 수 있다.

완창하려면 8시간이 넘게 걸리는 이 대작은 변화무쌍하면서도 어려운 기교로 듣는 이의 마음을 녹이고도 남음이 있다.

판소리는 전세계 음악인류학자들이 이미 그 음악적 가치를 인정하고 있다.

서양의 예술음악은 고도로 발달된 음악으로 보고 동양의 민속음악은 원시음악으로 취급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쿠르트 작스 같은 음악인류학자는 "동양의 민속음악을 원시음악으로 취급하는 사람들이야말로 원시인이다" 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작스가 그런 말을 했다고 해서가 아니다.

귀한 것을 귀한 것으로 아는 문화적 안목이 필요하다는 것을 이 기회에 다시 한번 더 확실해 해두고 싶다.

이강숙<한국종합예술학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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