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동·기·적…김수환 추기경 추모…새벽부터 한밤까지 15만 행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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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5월 29일 성나자로 마을에서 미사를 집전하는 김 추기경.

 18일 새벽 4시30분 서울 명동성당, 동이 트지 않아 바람이 찼다. 고(故) 김수환 추기경을 추모하는 이들은 이미 촘촘한 줄을 만들고 있었다. 성당 문은 오전 6시에나 열렸다. 아침엔 넥타이를 맨 회사원과 교복을 입은 학생이 많이 보였다. 2~3시간은 기다려야 하니까, 생업과 학업이 있으니 일찍 나섰을 것이다. 행렬은 조금씩 살이 붙더니, 이내 명동성당에서는 그 끝을 가늠할 수 없게 됐다.

서울 대방동에 사는 이영신(65·여)씨는 오후 1시에 행렬에 합류했다. 이씨는 아들의 손을 단단히 잡고 줄의 끝을 찾았다. 성당에서 가톨릭회관을 타고 돌아 삼일로로 갔다. 끝은 보이지 않았다. 평화방송을 거쳐 남산 1호 터널 쪽을 향해도 마찬가지였다. 줄은 세종호텔을 거쳐 지하철 명동역까지 이어졌다. 행렬이 명동을 완전히 감싸안고 있었다. 17일에는 1㎞ 정도의 줄이 이어졌었다. 그러나 이날은 줄잡아 2~3㎞ 정도의 줄이 종일 유지됐다. 시간이 흐를수록 행렬의 길이와 무게는 커지고 있었다.

엄마가 손을 꼭 잡고 있는 아들 요한은 25세다. “다운증후군이어서 대여섯 살 난 아이와 같다”고 했다. “돌아가시면서 하신 ‘고맙다’는 말이 날 여기까지 오게 만들었다”고 했다.

이씨는 지난해 11월부터 단칸방에 살고 있다. 세들어 살던 집이 경매에 넘어갔다. 모자(母子)가 입은 패딩 점퍼의 소매는 해져 있었다. 몇 년을 입었는지 모를 옷이었다. 이들의 현실은 팍팍했다. 그러나 엄마는 “감사하다”는 말을 입에 올렸다. “소중한 아들을 줘서, 다른 다운증후군 아이들보다 말을 더 잘해서, 아빠가 없지만 건강하게 자라줘서 감사한다”고 했다.

모자는 3시간 남짓 줄을 선 뒤, ‘아주 잠깐’ 추기경을 만날 수 있었다. 그의 앞에 머문 시간은 2~3초도 되지 않았다. 이들이 성당 문을 나선 오후 4시, 행렬은 줄어들지 않았다. 엄마는 “이렇게 긴 줄을 보니, 내가 죽어도 아들이 살아갈 수 있을 것 같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모인 게 기적 같다”고 했다. 모자가 집으로 향하는 길에 ‘긴 행렬’이 동행하고 있었다. 행렬 속에는 김 추기경이 생전에 남긴 인연도 있었다. 중소기업에 근무하는 이연휘(46)씨는 1987년 6·10 민주화운동 때 ‘넥타이 부대’로 시위에 참가했었다. 진압 경찰에 맞아 어금니가 부러지기도 했다. 시위대가 명동성당 옆을 지날 때였다. 김 추기경이 나타나 “그래도 서로 사랑하라”고 했다. 그땐 이해할 수 없었다. “삶의 고통도 결국엔 보약이 된다”는 김 추기경의 말을 그땐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10년 전 뇌졸중으로 쓰러지고 나서야 그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추기경의 말이 가슴을 쳤다. 그리고 나밖에 안 보이던 작은 시야 속에 아들딸과 아내가 들어왔다. 이를 악물고 재활에 몰입했고, 이씨는 다시 사회로 복귀할 수 있었다.

행렬 옆으로 “사랑하세요”라고 적힌 긴 플래카드가 나부꼈다. 그 말씀이 사람들을 움직이고, 행렬을 더욱 두툼하게 만들고 있는 듯했다. 이날 15만 명의 추모객이 추기경을 찾았다.

◆특별취재팀= 사진부 김경빈·오종택·최승식·박종근·강정현, 사건사회부 강인식·임미진·이충형·장주영·이에스더·정선언· 김진경, 내셔널부 김경진 기자(취재기자들이 18일 새벽 4시30분부터 자정까지 명동성당을 찾은 추모객을 만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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