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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 카펫 시대’ 지고 ‘新검약 패션’ 확산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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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호 11면

“이번 위기는 마치 ‘봄맞이 대청소’와 같다. 도덕적인 면에서나 물질적인 면에서 모두 그렇다.”

불패 신화 흔들리는 명품 시장

명품업체 샤넬의 수석 디자이너 칼 라거펠트가 최근 프랑스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그는 고가의 럭셔리 제품(명품)들이 날개 돋친 듯 팔리던 소비 풍조를 ‘인조 보석이 박힌 레드 카펫’에 비유했다. 그러면서 앞으로 유행할 패션의 키워드를 ‘신검약(the new modesty)’으로 정의했다.

럭셔리 산업은 흔히 경기를 타지 않는 분야로 치부돼 왔다. 불황기에도 부유층의 소비는 꺾이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금융위기에는 좀 다르다. 리먼브러더스가 파산보호 신청을 한 지난해 10월부터 전 세계 명품산업은 급속히 위축되고 있다. 샤넬은 최근 200명의 비정규 직원들을 해고했다. 1만6000명의 전체 직원 중 1%에 불과한 숫자이지만 프랑스에서는 이를 2차 세계대전 당시인 1939년 코코 샤넬이 전 직원을 해고하고 점포 문을 닫았던 것에 견주고 있다. 루이뷔통모에헤네시(LVMH) 그룹은 일본 도쿄의 초대형 매장 개장 계획을 취소했다. 소니아 리키엘은 고객 1500명을 초대해 호화 패션쇼를 열기로 했다가 규모를 200명으로 줄였다. 티파니의 지난해 크리스마스 시즌 매출은 전년보다 20% 이상 줄었다. 금융계 고액 연봉자들이 즐겨 타던 초고가 자동차 브랜드의 상황은 더 나쁘다. 영국 벤틀리의 지난해 판매실적은 전년보다 25%, 랜드로버는 30% 줄었다.

파격적인 바겐세일도 이어지고 있다. 버버리의 웹사이트에서는 1만1000파운드짜리 악어 가죽 핸드백이 4400파운드에 팔린다. 1200파운드짜리는 777파운드에, 700파운드짜리는 300파운드도 안 되는 가격에 나왔다. 멀버리는 가격 할인이나 저가 상품 판매는 없다고 선언했던 콧대높은 브랜드다. 하지만 최근엔 천으로 만든 95파운드짜리 핸드백을 팔기 시작했다.

사치품 소비가 주춤했던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1987년 증시 폭락, 2001년 9·11 테러 이후에도 소비자들은 사치품 소비를 줄었다. 하지만 요즘 분위기는 그때와 사뭇 다르다. ‘과소비=부도덕’이라는 생각이 번지고 있다. 금융 위기의 주범인 월스트리트 거물들이 엄청난 연봉을 받으며 호화판 생활을 해왔다는 것이 밝혀지면서부터다. 뉴스위크 최신호는 “우리는 부자들을 미워하지 않는다, 조롱할 뿐이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원래 미국인들은 유럽인보다 부자들에게 관대한 편이었다. 유럽과 달리 자수성가형 부호들이 많아 사회적으로 존경받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미국에서조차 고액 연봉을 받으며 흥청망청 살아온 금융계 최고경영자(CEO)들에 대한 시선은 싸늘하다. 구제금융을 받은 기업 CEO들의 연봉을 50만 달러로 제한하겠다는 방침조차 반대하는 분위기다. 뉴스위크의 여론조사 결과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적정 연봉은 20만 달러였다.

부자들은 과시적 소비를 부끄럽게 여기기 시작했다. 통신 사업으로 재산을 불린 마이클 허튼슈타인은 “지금 당장이라도 페라리를 구입할 수 있다. 하지만 친구들이 곤궁한 처지에 놓인 요즘 같은 때 내키는 대로 고가품을 사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고가의 제품을 초라한 상자에 담아 집으로 배달해 주는 회원제 인터넷 사이트도 등장했다. 초호화 백화점 매장에서 쇼핑하는 모습을 드러내고 싶지 않은 부자들을 겨냥한 것이다.

이와 함께 소비의 진정한 가치를 찾아야 한다는 자성의 목소리도 나온다. 프랑스의 일간신문 르 피가로는 ‘가치의 혁명’이라는 표현을 썼다. 일을 줄이고, 가족을 중시하며, 생활 규모를 축소하는 풍조를 전망하면서다. 일각에선 럭셔리 브랜드들의 가격 거품을 빼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프랑스 보석업체 모부셍의 앨레인 네마르크 대표는 “이성적이고 신중하며 검소한, 즉 진짜 가치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심지어 “그리스 시대부터 사치품은 언제나 부도덕의 상징이었다. 낭비는 천박함의 표현이며 존재할 가치가 없다”는 과격론까지 등장했다. 이는 고가품에만 적용되지 않는다. 서민층에서도 과소비에 대한 반성이 나오고 있다.

IHT는 최근호에서 충동 구매를 불러오는 쇼핑몰 출입을 줄여야 한다는 주장을 실었다. “‘소비자들과 대형 쇼핑몰의 50년 결혼 생활’에 대해 카운셀링이 필요해졌다”고 지적했다. 칼 라거펠트는 “이번 위기처럼 드라마틱한 충격이 없으면 창조적인 진화도 없다”고 말했다. 패션과 소비의 새 영역을 개척할 기회라는 것이다.

일부 전문가들은 분수에 넘치는 소비를 멈추고 근검절약의 생활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소비가 살아나지 않으면 경제도 살아나지 않는다는 딜레마가 남는다. 합리적인 소비, 가치 소비에 대한 논란이 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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