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범의 시네 알코올]그녀를 떠올리는, 빨갛고 맵싸한 음료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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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호 07면

60대 중반의 로얄 테넌바움(진 해크먼)은 전직 변호사다. 젊을 때 어린 세 남매와 부인을 두고 집을 나와 제멋대로 살면서 남의 돈 떼먹고 감옥까지 갔다 왔다. 변호사 자격도 뺏겨버렸다. 그래도 남은 돈으로 호텔에 장기 투숙하며 살아왔는데, 그마저 떨어졌다. 마침 부인이 다른 남자와 결혼하려 한다는 얘길 듣는다. 도장만 안 찍었지 사실상 오래전에 이혼한 사이인데도, 로얄은 배가 아프다. “집에 가자. 지금 안 가면 영영 못 간다.”

영화 ‘로얄 테넌바움’(2001·웨스 앤더슨 감독)의 블러디 메리

부인을 만난다. 부인은 냉정하다. 떠나가는 부인의 뒤통수에 대고 즉흥적으로 말한다. “나 암으로 죽어가. 6주 남았대. 남은 동안 가족들을 보고 싶어.” 부인이 돌아와 울면서 말한다. “정말이에요? 어떻게 해.” 로얄은 조금 미안하다. “아니, 죽는 건 아니고….” 부인에게 한 대 맞는다. 부인이 다시 간다. 다시 뒤통수에 대고 로얄이 외친다. “나 죽어. 정말이야.”

‘로얄 테넌바움’은 이렇게 사기를 쳐서 집에 다시 들어간 로얄이 우여곡절을 겪으며 가족, 특히 자식들과 화해하는, 아니 자식들로부터 용서를 받는 이야기다. 이렇게 요약하면 진부한 가족 드라마 같지만, 하나같이 엉뚱한 테넌바움 가족 구성원들이 펼쳐보이는 황당한 코미디가 ‘가족애의 회복’이라는 주제와 절묘한 조화를 이루면서 유사품을 찾기 힘든 독특한 영화를 만들어간다.

영화에서 로얄만큼 비중 있게 나오는 이가 막내아들 리치(루크 윌슨)이며, 이번에 다룰 술도 그가 마시는 것이다. 그는 내성적인 인물이다. 어릴 때부터 누나 마고(귀네스 팰트로)를 짝사랑했다(마고가 입양아이니, 둘이 사귀면 근친상간에 해당되는지 아닌지 잘 모르겠다). 잘나가는 테니스 선수였다가 마고가 결혼한 다음 날 시합을 엉망으로 만들어버리고는 배를 타고 세계를 떠돌아다닌다. 배 안에서 그가 들고 있는 유리잔에 담긴 빨간 음료는 무슨 주스처럼 보이지만 거기엔 샐러리 줄기가 꽂혀 있다. 이건 ‘블러디 메리’다.

블러디 메리는 보드카와 토마토주스를 기본으로 향신료와 양념을 섞는 칵테일이다. 샐러리를 장식용으로 꽂거나 아니면 샐러리 향을 첨가한 소금을 넣기도 한다. 서양식 해장술로, 그 기원에 대한 위키피디아의 설명은 이렇다. 1920년대에 파리의 ‘해리스 바’에서 일하던 페르낭 프티오(1900~75)라는 바텐더가 미국에서 건너온 헤밍웨이 일행들의 숙취를 풀어주기 위해 만들었다는 것이다. 페르낭은 뒤에 미국으로 건너가 유명 호텔의 수석 바텐더를 지냈다.

‘블러디 메리’라는 이름에 대한 설도 많은데, 흔히 알려진 게 16세기 잉글랜드 첫 여왕인 메리 1세가 신교도 300여 명을 잔인하게 처형한 걸 두고 이 이름을 따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페르낭에 따르면 이 칵테일을 마신 한 미국인이 이렇게 말했단다. 시카고에 있는 ‘버킷 오브 블러드’(우리말로 ‘피 한 양동이’)라는 바의 웨이트리스 별명이 ‘블러디 메리’인데, 이 칵테일이 그 여자를 생각나게 한다고. 그래서 블러디 메리가 됐단다.

여하튼 리치는 집으로 돌아와서도 여러 차례 이걸 마신다. 영화는 관객이 블러디 메리라는 걸 몰라볼까봐 그때마다 샐러리 줄기를 꽂아놓는다. 또 리치는 주머니에 후춧가루 병을 넣고 다니며 마실 때마다 후추를 친다. 뭘 말하려는 걸까. 리치가 스파이시한 것, 맵고 짜고 향이 센 음료를 좋아한다? 그가 감각이 예민한 데 더해 우울증이 있다는 걸 말하려는 게 아닐까. 스파이시한 음식이 우울증에 도움이 되는 점을 감안하면 말이다.

실제로 리치가 우울함을 극복하고 마고에게 사랑을 고백하기까지의 과정이 영화의 또 다른 한 축을 이룬다. 마고는 히피 같고, 약간은 수수께끼에 쌓인 인물로 나오는데 어릴 때부터 집을 나와 떠돌아다녔고 남자 편력도 많다. 리치는 마고가 다른 남자, 그것도 옆집에 살던 자기 친구와 사귀어왔다는 얘기를 듣고는 자살을 기도한다. 병원까지 실려갔다가 회복한 뒤 집에 돌아와 마고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키스한다. 잠시 동안 나란히 눕는다.

리치의 마고에 대한 사랑은 ‘포레스트 검프’에서 세상을 떠도는 히피 여자를 죽을 때까지 못 잊는 주인공 검프의 사랑과 닮아 있다. 혼자 떠도는 여자에 대한 범생이(모범생)의 사랑. 강해 보이지만 실은 약함에도 불구하고 보호를 필요로 하지 않는 그녀(들).

둘이 누워 있을 때 나오는 롤링 스톤스의 노래 ‘루비 튜즈데이’가 더없이 애잔하게 들린다. “그녀는 어디서 왔는지 말해주지 않죠. 이미 가버린 어제는 중요한 게 아니겠죠. 해맑은 낮이건, 칠흑 같은 밤이건 아무도 모른답니다. 그녀가 왔다 가는 걸. … 왜 그렇게 자유로워지려고 하는지 그녀에게 묻지 마세요. 그녀는 그것만이 유일한 길이라고 말할 겁니다.”

블러디 메리는 보드카와 토마토주스만 섞어도 맛있다. 스트레이트 양주잔에 토마토주스를 3분의 2쯤 채우고, 그 위에 보드카를 살살 따르면 섞이지 않고 층이 진다. 그 상태로 원샷을 하면 처음엔 목이 따끔하지만 이내 걸쭉한 토마토주스가 그걸 보듬는다. 그러곤 달큼하면서도 싸한 잔향이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루비 튜즈데이’의 후렴구가 떠오른다. “당신이 매일매일 변해가는 동안, 나는 여전히 당신을 그리워할 겁니다.”


일간지 영화담당 기자, 문화부장을 거쳐 영화판에서 어슬렁거리고 있는 시네필. 영화에 등장하는 술을 연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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