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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핵 방송 보고서'는 공정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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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지난 4월 대통령 탄핵방송 보도의 공정성 여부에 대해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던 방송위원회가 언론학회에 연구 의뢰를 했을 때 학회 집행부는 사실 많이 망설였다. 정치적 입장과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돼 있는 사안이라 연구 결과가 어느 쪽으로 나오든 학회 입장이 불편해질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시쳇말로 아무리 잘해봤자 본전 찾기도 어려운 과제였다.

'대통령 탄핵 관련 TV방송 내용 분석'보고서 원문보기

그러나 언론학자로서 방송 저널리즘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공정성의 개념과 기준이 혼란을 겪고 있는 상황을 외면하기 어려웠다. 1980년대 이후 약 20여년간 학계와 방송계가 수많은 세미나와 연구 작업, 토론 끝에 확립한 것이었기에 뜨거운 감자라고 회피하는 것은 언론학을 연구하는 학회의 본분과 사명을 저버린 처신이라 판단돼 방송위원회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후 다가온 더 큰 고민은 연구진의 구성이었다. 도대체 어느 연구자가 부담스러운 연구과제에 참여하려 할 것인가.

일단 학회의 이름으로 이뤄지는 연구사업의 집행 관례에 따라 연구 희망자 공모를 냈고 자천.타천으로 10여분이 추천됐다.

학술단체다운 연구진 구성의 기준은 결국 전문성이다. 저널리즘 연구와 뉴스분석 영역에서 권위를 인정받고 학문적 업적을 쌓은 연구자가 최적이다. 연구자들은 양적 방법론뿐 아니라 질적 방법론에 대한 이해와 응용능력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탄핵방송에 관한 논의 과정에서 끊임없이 제기된 문제는 수치에 기반한 기계적인 중립성의 문제였기에 양적 분석에 의존하는 실증적 방법만으로는 결과가 만족스러울 수 없을 것으로 판단했다. 짧은 기간에 효율적으로 수행해야 하는 연구인 만큼 팀워크도 중요했다.

결국 힘든 과정을 거친 끝에 프레임 분석과 담론 분석 같은 비판적 연구 영역의 질적 분석에도 정통한 연구인력을 포함, 탄탄한 전문성을 갖춘 연구진을 구성했다.

그 결과 나온 보고서는 학술적 전문성이나 분석의 엄밀성에서 볼 때 탁월한 것이었다. 연구 결과에 불만인 분들도 연구 수준의 질적 우수함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으로 본다. 세계 어느 나라도 이처럼 다양한 양적.질적 분석의 틀을 입체적으로 적용해 뉴스기사를 분석한 사례가 없는 것으로 안다. 아마 앞으로 언론학을 공부하는 연구자나 학생이면 반드시 참고하지 않을 수 없는 역작이라고 생각한다. 연구의 결론은 언론학회 집행부 입장에서도 놀라운 것이었고, 정치적 의미도 염려됐으나 그것이 타당하게 이루어진 분석 결과에 논리정연하게 기초하고 있는 한 문제삼을 수는 없었다.

일부에서는 보고서가 기계적 중립성만 주장했다고 하는데, 그런 지적은 양적 분석의 부분만 보고 질적 분석을 읽지 않은 탓이 아닌가 생각된다. 보고서에 대한 반박으로 제기된 '방송 공정성 기준'에 대한 문제 제기는 오히려 반길 만한 것이다. 굳이 BBC의 기준을 다시 끄집어낼 필요도 없이 우리나라 방송계의 공정성 기준은 BBC의 기준을 포함해 여러 나라의 사례를 검토해 오랜 세월의 연구와 투쟁을 거쳐 확립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 방송계의 자체 기준이야말로 이번 연구에서 채택된 공정성 판정의 기준이기도 했다.

이번 연구가 다른 학회와 연구진에 의해 재검증되는 것에 대해 대환영이다. 그럴 경우 이번의 연구를 보완하는 보다 정교하고 다양한 연구방식이 도입될 수 있겠으나 공정성을 판정하는 기본 기준만큼은 BBC의 것도, 미국이나 일본의 것도 아닌 우리 방송계가 자체적으로 확립한 공정성의 기준이 바탕이 돼야 한다.

일부에서는 사회가 변하면 공정성의 기준도 달라져야 한다고 비판한다. 전적으로 옳은 이야기다. 그러나 방송인들이 매일매일 일상적으로 지켜나가야 하는 저널리즘의 근간을 바꾸려면 폭넓은 사회적 논의를 거쳐 합의를 도출해내야 한다. 개인 혹은 어느 집단이 임의로 그 룰을 바꿀 수는 없다고 본다.

현재 우리 사회는 그 어느 때보다 이념적.정치적, 그리고 세대 간 갈등이 첨예해지고 있다. 언론 미디어는 근본적으로 사회적 의사소통을 확장하고 사회적 합의와 화해를 이루어 나가는 데 중추적 역할을 해야 할 사명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우리의 언론 매체들은 유감스럽게도 이런 문제들을 극복하는 데 기여하는 것이 아니라 갈등과 대립을 증폭시키고 있다.

이 같은 인식 아래 언론학회는 우리 사회의 대립적인 커뮤니케이션 문제들을 학술의 장으로 끌어들이는 노력을 통해 언론의 순기능적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 왔다.

그동안 다양한 연구 작업을 했고 그것을 토대로 다음달 신문.방송.인터넷 등 언론 전반에 관한 대토론회를 연다. 여기서 저널리즘 전반의 공정성 기준과 개념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도 이루어질 것이다. 이번 보고서는 방송 저널리즘 연구의 종착점이 아니라 논의의 시작일 뿐이다.

이번 연구사업을 총괄한 언론학회 회장의 입장에서 그 어떤 기관이나 단체도 보고서를 정치적 논쟁의 수단으로 삼지 말기를 부탁한다. 과도한 뉴스가치를 부여해 파장을 확대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고 정략적인 공격의 대상으로 삼는 것도 우려할 일이다. 자칫하면 학문의 자유를 크게 위축시킬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또 연구진이나 학회 집행부에 대한 인신공격을 지양하고 연구 성과를 내용 자체로 평가하고 비판해주기 바란다.

공영방송이 국민의 방송이라는 말이 우리나라에서는 그냥 원론적인 수식어가 아니다. 각별한 애정이 깃든 말이다. 공영방송에 대해 열렬한 지지를 보내는 사람이든, 신랄한 비판을 하는 사람이든 그 바탕에는 깊은 애정이 자리잡고 있다.

특히 언론학자들은 지난 4반세기 동안 공영방송의 연구를 위해 BBC의 칙서나 NHK의 가이드 라인을 닳도록 분석.인용하면서 언제 이 단계를 벗어날 것인지 자괴심에 빠지기도 했다. 영국과 일본, 그 어느 나라도 능가할 수 있는 훌륭한 공영방송을 키우는 데 일조하는 것이 언론학자들의 꿈이다. 이번 보고서가 우리의 상황을 다시 한번 점검해보는 계기가 돼 방송 발전을 위한 생산적 논의의 장을 열어갈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박명진 한국언론학회 회장·서울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