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노트] 김달진을 위하여, 한국미술을 위하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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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엊그제 조선 22대 임금 정조의 친필 서신 299통이 쏟아져나와 의혹과 베일에 싸인 이 시기, 인간 정조에 대한 재조명이 이뤄지고 있다. 기록 문화를 경시하는 우리네 풍조에서 자료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전시와 경매 등 작품 발표·판매에만 치중할 뿐 자료 축적은 부족한 한국 미술계도 여기서 예외는 아니다. 최근 2년간 비대해진 미술시장에서 불거진 ‘위작 시비’는 이 같은 문제점을 드러낸다. 전작(全作) 도록(카탈로그 레조네)까지는 아니더라도 작가별 전시 팸플릿만 빠짐없이 남아 있었다면 위작·모사·표절 시비를 가리는 데 일조할 수 있었을 것이다.

10일 오후 서울 정동 덕수궁미술관 시청각실에서는 미술자료 축적에 박차를 가하는 모임이 열렸다. 오광수 전 국립현대미술관장, 최종태 서울대 미대 명예교수, 서성록 한국미술평론가협회장 등 미술계 인사 50여 명이 자리를 함께한 이 드믄 모임은 ‘김달진 미술자료박물관 후원회’ 발기인 창립총회다. 김달진(54·사진)씨는 미술계에서 ‘걸어다니는 미술연감’으로 통한다. 고3 때인 1972년 미술자료 수집을 평생의 업으로 삼은 뒤 사재를 털어, 발품을 팔아, 자료를 모았다. 그 결실로 지난해 서울 통의동 좁은 지하방에 김달진 미술자료박물관을 마련, 개관전도 열었다. 여기까지는 ‘미담(美談)’이다. 국가와 사회의 손이 닿지 않는 빈틈을 개인의 의지로 메운 아름다운 성과 말이다.

한국에서 손꼽는 미술자료실은 과천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서소문 서울시립미술관, 서울 한남동 삼성미술관 리움 등에 있다. 대부분 미술관 내 전시·연구 기능을 보조하기 위한 한 부서 조직이다. 작품 수집과 전시기획에 비해 자료실 운영은 극히 부차적 문제로 치부되고 있음은 예산 편성에서도 드러난다. 국립현대미술관의 2007년 예산 237억원 중 자료 구입비는 2600만원으로 전체 예산의 0.14%에 불과하다.

자료박물관 운영을 언제까지나 이 ‘집념의 사나이’ 혼자 몫으로 내버려 둘 수 없는 이유다. 이날 창립총회에 나온 유희영 서울시립미술관장은 “그간 변변한 미술자료관이 없었다는 것은 국가 차원의 수치다. 기록문화를 경시하는 풍조 속에서 개인의 집념 덕에 그나마 여기까지 왔다는 게 우리의 현주소”라고 신랄하게 지적했다.

후원회에 참가한 사람들은 국내 최초의 미술자료 전문박물관이라는 이름이 무색하지 않도록 힘을 모으자고 입을 모았다. 습기와 싸우는 좁은 지하방을 벗어나 번듯한 공간을 확보할 수 있도록, 흩어져 있는 미술자료의 체계적이고 일원화된 수집을 위해 십시일반 손을 모을 계획이다. 후원회는 일단 김달진씨가 36년간 모아둔 18t 분량의 자료를 제대로 정리하고 활용할 수 있도록 공공 미술아카이브 설립을 위한 정부 청원을 시작했다.

권근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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