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의눈] 부도사태와 정부역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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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한보.삼미.진로.대농.기아, 그리고 다음은 누구?" "우린 아니야" "누구 잡으려고…" "저의가 뭐냐?" 그러다 루머로 확인되는 순간 '후유' 하는 한숨이 금융권 여기 저기서 새나온다.

여럿이 둘러앉아 '나는 아니야' 하며 남 앞으로 정신없이 뺑뺑이를 돌리는 놀이가 연상된다.

패가 자기 앞에 멈춰서는 순간 부도기업으로 낙점된다.

도처에 '부도 악령 (惡靈) 의 출몰' 이다.

이른바 '부도유예협약' 은 말이 '유예' 지 실은 부도를 '촉진' 한다.

어느 기업의 자금사정이 좋지 않다고 소문나면 금융기관들은 다투어 대출금을 회수한다.

'협약' 으로 원리금 상환이 묶이기 전에 한푼이라도 더 거둬들이려 혈안이고, 이 과정에서 자금난은 더욱 악화돼 부도는 촉진된다.

부도유예협약이 있는한 대형부도기업은 계속 생겨나게 돼 있다.

일종의 '자기실현적 예언' 이다.

3개 재벌그룹이 부도유예협약의 적용을 받고 있고, 다음차례로 손꼽는 2개의 재벌이름이 오르내린다.

하기야 채권금융기관들이 어느 한 곳을 겨냥해 자금을 다투어 회수하려들면 대재벌인들 배겨낼 재간이 없다.

재무구조가 하나같이 취약하고, 채권확보도 제대로 안되는 상황에서 추가자금지원은 밑빠진 독에 물붓기일 뿐이다.

재벌기업들의 부도 도미노현상은 부실투자와 방만경영의 누적 탓이다.

한시적 상환유예나 긴급수혈식 자금지원으로 근원적 치유가 불가능한 구조적 질환이다.

시민단체들이 '기업살리기' 에 나서고 온정 (溫情) 구매러시 등 전에 없던 현상도 빚어진다.

"정부는 뭘 하느냐" "자유시장경제의 나라 미국도 정부가 나서 기업을 살려내지 않았느냐" 는 여론의 다그침도 거세다.

2차 석유파동직후인 80년 미국의 크라이슬러는 엄청난 재고를 안고 파산에 직면했다.

휘발유값 폭등으로 휘발유가 많이 먹히는 대형승용차의 매기가 뚝 끊겼기 때문이다.

79년 포드자동차 사장에서 해임된 리 아이아코카가 사장에 취임하면서 연방정부에 SOS를 발했다.

빅 스리 (자동차3사) 는 미국산업의 자존심이었다.

정부와 의회가 파산을 방치하지는 않을 것으로 아이아코카는 믿었다.

시장경제체제에서 정부의 역할에 관한 논쟁으로 온 미국이 시끌시끌 했다.

미국의회는 마침내 연방정부보증아래 15억달러의 긴급자금지원을 조건부로 허용했다.

20억달러의 자금은 자체조달한다는 조건이었다.

아이아코카는 뼈를 깎는 자구 (自救) 노력을 담보로 신용을 끌어다 댔다.

비효율적인 공장을 폐쇄하고 노조와 다량해고및 임금삭감에 합의했다.

연료효율이 높은 소형모델을 새로 개발하고 광고전략을 공격적으로 바꾸며 TV광고에 스스로 출연했다.

83년 24억달러의 이익으로 3년만에 빚을 갚으면서 아이아코카는 일약 경영의 귀재로 떠올랐다.

오늘날 크라이슬러는 기술지향적이고 원.부자재의 외부조달비율이 가장 높은 (67%) '날렵한 기술기업' 으로 다시 태어났다.

강도높은 자구노력과 아이아코카적 경영, 그리고 기술의 3박자가 일궈낸 크라이슬러 신화다.

우리 기업들의 자구노력 강도는 아직 멀었다는 평가가 일반적이다.

정부나 은행을 비난하며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한다는 지적도 들린다.

부도 도미노가 꼬리를 무는 상황에서 중요한 것은 정부역할의 재정립이다.

온정이나 상황논리, 연말대선등 정치적 고려는 문제의 해결을 그르칠 뿐이다.

개별기업문제에 직접 개입을 삼가고 기업부실이 전체 금융부실로 이어지지 않도록 고리를 차단해야 한다.

돈을 찍어 저리로 빌려주는 한은특융은 국민적 공감대 형성이 필수적이고, 국가채무보증 역시 국회의 동의를 요한다.

부실기업처리는 당사자의 자구노력과 채권금융단과의 협의에 맡기고, 정부는 시장기능에 따라 인수.합병이나 퇴출이 활성화될 수 있도록 규제를 완화하고 제도적 틀을 갖춰주는데 주력해야 한다.

정부가 무엇을 해야 하는 것보다 무엇을 하지 않아야 할 것인가가 훨씬 더 중요한 시점이다.

변상근 편집국장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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