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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호의 영화 풍경] 시간을 거스르는 스토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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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어공주'(감독 박흥식)는 장르 영화로선 드물게 시간의 순서를 깨는 영화다. 대개 장르영화는 자연스러운 시간순서를 뒤바꾸는 '무모한' 시도를 하지 않는다. '옛날 옛날에 누가 태어나서 사랑하고 행복하게 살다 죽었다'는 식의 동화적인 시간순서가 장르의 문법이다. 걸작 '시민 케인'이 흥행에 성공하지 못한 이유도 시간의 순서를 뒤섞은 플래시백의 '빈번한' 등장이라는 것이 주로 지적됐다.

로맨틱 코미디 '인어공주'는 시간의 질서를 '감히' 위반하는 데, 그게 영화의 강점으로 작용한다. 우체국 직원인 나영(전도연)은 남들이 볼까 부끄러울 정도로 욕 잘하고 악착같은 엄마가 밉다. 차라리 없었으면 더 행복했으리라 희망한다. 도무지 인생에 멋이라곤 없어 보이는 엄마는 이해할 수 없는 존재이고, 딸은 "절대 엄마처럼 살지 않을 거야"라고 다짐한다.

딸은 외화 '백 투 더 퓨처'의 소년처럼 과거로 여행해 젊은 시절의 엄마인 연순(전도연, 1인 2역)을 만난다. 만나기만 하는 게 아니라 '손님' 자격으로 아예 함께 산다. 현재와 과거는 아무 경계선 없이 이렇게 자연스럽게 공존한다. 다시 말해 현재와 과거라는 다른 시간대가 동일한 공간에서 펼쳐지는 게 '인어공주'의 매력이다.

과거로의 여행을 통해 딸은 욕쟁이 엄마의 옛 모습이라고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청순한 처녀를 만난다. 어찌 보면 현재의 자신 보다 더욱 아름다운 사랑을 했던 사람들이 지금은 '구질구질한' 인생을 사는 나영의 부모들이다. '인어공주'는 세대 간의 갈등을 이렇게 시간을 역방향으로 돌려 해소하고 있다. 과거는 현재의 고통을 행복으로 돌려놓는다.

또 다른 로맨틱 코미디 '내 여자 친구를 소개합니다'(감독 곽재용)도 시간의 트릭을 이용하고 있다. 멀리는 '선셋대로'(감독 빌리 와일더), 가까이는 '아메리칸 뷰티'(샘 맨더스)처럼 죽은 사람이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으로 영화는 시작한다.

젊은 여자(전지현)가 고층빌딩의 난간에 서 있는데, 왜 이 여자가 그 곳에서 죽음의 추락을 시도하고 있는지를 죽은 남자가 설명한다. 플래시백을 통해 영화는 빠르게 과거로 달려간다. 두 사람의 사랑이야기는 과거 속에서 모두 설명되고, 우리는 다시 현재의 빌딩 난간으로 돌아온다. 과거는 로맨틱 코미디로, 그리고 현재는 멜로식으로 좀 어지럽게 영화는 진행되는데, 다시 돌아온 현재에서 난간에 걸친 죽음 직전의 생명이 애드벌룬 위로 떨어져 살아나는 지나치게 코믹한 순간에서 많은 관객은 '속았다'는 불쾌감에 빠진다. 소중한 생명이 유희의 대상이 되면 장르영화의 관객은 떠난다.

유상곤 감독의 데뷔작인 호러물 '페이스' 도 시간과의 게임을 한다. 성형과 장기이식이라는 최근의 상업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소재를 이용한 '페이스'는 현재가 과거와 만나면 공포가 생긴다는 어두운 영화다. 신파조의 대사가 약간 거슬리긴 하지만 데뷔작을 호러물로 택한 감독의 용기가 돋보이는 영화가 '페이스'다.

당신은 어떤가? 몰랐던 과거를 만나면 행복한가, 아니면 무서운가.

한창호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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