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단보도 정지선 단속 열흘 "정체 되레 줄었어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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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고 봐. 내일부터 길 무지 막힐거요. 다들 차 몰고 나오는데 정지선 안지키면 무조건 단속한다니. 사거리마다 여기저기 막히고 운전자들이 죽는다고 해야 (단속 방침이) 바뀌겠지. 앞차 따라가다 갑자기 멈추면 어쩌란 말이야. 정지선 지킨다고 급정거 하면 추돌 사고 많이날 텐데. 에잉, X들. 자기들은 관용차 타고 편하게 다니니까 서민들 죽는 건 모르고…."

횡단보도 정지선 지키기 단속이 시작되기 전인 지난달 31일. 교통 혼잡이 심한 월요일 출근길에 이용한 택시 기사는 단속 방침을 큰 목소리로 비난했다. 나이 지긋한 택시 기사는 반말 비슷한 어조로 열을 올렸다. 정지선 단속은 과연 문제가 많은 탁상행정일까. 교차로에 가까와지면 속도를 줄이고 앞 차가 막히지 않고 빠져나가는 등 '정상적으로' 운전하면 될 터인데….

◇큰 부작용 없어= 이 기사분께는 미안하지만 본격적인 단속이 시작된지 열흘이 지났지만 큰 혼란은 생기지 않았다. 편도 2차로 이하의 도로에서는 우회전하려는 차량이 정지선을 지키고 서 있는 앞 차량 때문에 교차로를 지나지 못해 대기행렬이 길어지는 곳도 있었다. 예를 들어 서울 홍익대 정문에서 지하철 2호선 홍익대역으로 가는 길의 경우 골목에서 나와 좌회전 하려는 차량과 직진차량, 우회전 차량이 편도 2차로 도로에 얽혀 교차로를 통과하는데 예전보다 5~10분씩 더 걸리는 모습이었다.

편도 4차로 이상의 몇몇 대형 교차로에서는 오히려 혼잡이 줄어들기도 했다. 출퇴근 시간이면 연세대 방향 직진차량과 우회전 차량이 얽혀 차량 흐름을 막는 경우가 적지 않았던 서울 신촌 오거리의 경우 꼬리를 물고 교차로를 막는 차량이 줄어들면서 시내에서 양화대교나 서강대교 방향으로 운행하는 흐름이 원활해졌다. 한 교통경찰관은 "수신호로 막아도 눈치보며 슬슬 교차로에 진입하던 차량들 때문에 골치였는데 이달들어 단속을 의식해 교차로를 빠져나갈 수 없으면 알아서 정지선에서 대기하는 차들이 눈에 띄게 늘었다"고 말했다.

서울 광진구 구의동에서 광화문까지 차량으로 출퇴근하는 회사원 김현준(36)씨는 "횡단보도 앞에 서 있을때 앞으로 차 앞부분을 들이밀거나 뒤에서 경적을 울려대던 차들이 크게 줄었다"며 "신호를 한두번 더 받는 것 같지만 교차로 내에서의 정체가 사라져 운행시간에는 큰 차이가 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녹색 신호만 켜지면 무조건 교차로에 들어섰다가 오도가도 못하게 되는 것은 결국 자기 잘못이다. 통과할 수 없는 상황에서 교차로 나서는 것은 원래 불법이지 않는가. 교차로 가까와지면 속도를 줄이기보다는 가속 페달을 밟아대던 버릇도 악습일 뿐이다. 급정거하다 횡단보도 가운데를 막고 서게 되는 낭패를 볼 수 있다. 이번 단속 강화로 보행자들이 횡단 보도를 건너기는 좋아졌다.

◇정확한 단속 기준 알아야= 이달 들어 정지선 지키기 단속이 실시되자 교차로에서 우회전을 하려는 차량들이 횡단보도 통과 기준을 몰라 혼란이 생기고 있으며 경찰청 홈페이지에도 이에 대한 문의가 쏟아지고 있다. 일단 횡단보도 정지선 위반이라는 단속항목은 없다. 다만 적색 신호등이 들어왔을때 정지선을 넘어 횡단보도를 막고 있다면 도로교통법상 보행자 보호의무 위반으로 벌점 10~15점과 범칙금 6만원이 부과된다. 녹색 신호에 횡단보도를 지났더라도 미처 교차로를 빠져나가지 못한채 적색 신호로 바뀌면 교차로 통행방법 위반으로 단속된다. 벌점은 없지만 범칙금 4만원이다.

경찰은 "차량의 범퍼가 정지선을 침범했을 경우 단속 대상"이라면서 "무조건 벌점이나 범칙금을 부과하기보다는 다른 차량이나 보행자의 통행에 큰 지장을 주지 않는 경우 질서협조요청서를 발부하고 계도할 방침이지만 기준이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가능하면 정지선을 지키는 편이 안전하다"고 말했다.

◇우회전 차량이 문제= 현재 가장 혼선이 생기는 부분은 우회전 차량의 횡단보도 통과 부분이다. 대부분의 도로에서 가장 오른쪽 차로는 직진 차량과 우회전 차량이 함께 이용하기 때문이다. 경찰은 우회전 차량에게 길을 내주기 위해 정지선을 침범할 경우 단속 대상에서 제외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횡단보도를 완전히 가로막을 경우 단속될 가능성이 있어 주의해야 한다.

한편 우회전 차량의 경우 녹색 신호에 횡단보도를 통과한 뒤 우회전해 만나는 횡단보도 통과가 문제다. 교차로 직진 신호에서 우회전하면 나타나는 횡단보도는 대부분의 경우 보행신호가 들어온 상태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운전자들이 이 경우 횡단보도 앞에서 무조건 차량을 정지하기 때문에 교차로의 혼잡이 가중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실제로 교통문화운동본부가 지난 2일부터 이틀간 서울시내 5개 주요 교차로에서 우회전 차량을 살펴본 결과 차량 2000대중 86.1%인 1722대가 횡단보도를 통과해도 무방한 상황에서 불필요하게 대기하고 있었다. 이 때는 보행자 통행에 지장을 주지 않으면 통과할 수 있다.

경찰청 박종국 교통안전담당관은 "우회전시 횡단보도에 녹색신호가 들어와 있어도 보행자가 없으면 차량이 통과해도 된다는 대법원 판례가 있다"며 "교통소통을 원활히 하기 위해 경찰청 홈페이지 등을 통해 이를 널리 홍보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다만 이 경우에도 사고가 날 경우 모든 책임을 차량 운전자가 져야 하기 때문에 보행자 보호를 위해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

김창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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