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영의 글밭산책] '이렇게 쩨쩨한 로맨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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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쩨쩨한 로맨스 (원제 しょっぱいドライブ)
다이도 다마키 지음, 김성기 옮김, 황금가지, 205쪽, 9000원

나는 연애소설을 별로 읽지 않는 편이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뭐랄까, 연애하는 것 말고도 우리들의 생에 영향을 미치는 많은 것들이 빠져 있는 것 같은 이유, 한마디로 그들이 진짜로 사는 거 같지가 않아서다. 말하자면 그들이 소설 속에서 레스토랑의 고기를 우아하게 썰다가 소설 밖으로 나가 놋양푼에 밥을 비벼 와구와구 먹고 있을 거 같은 의심이 든다고나 할까, 아니면 직업도 변변치 않은 주인공이 수퍼에 가서 버드와이저나 하이네켄 같은 맥주를 태연히 집어드는 장면들이 나의 눈을 거스르는 게 싫은 이유도 있다. 어떤 때는 화도 치민다. 나는 별로 궁색하게 사는 사람은 아니지만 수퍼에 가서 외제 맥주를 살 때는 손이 조금 떨린다. 비싸기 때문이다. 남이나 나의 로맨스를 결코 싫어하지 않지만 하루 중의 돈을 생각하며 보낸다. 내게 들어올 수입과 날마다 줄줄이 이어지는 지출들, 오른 물가와 빨리도 돌아오는 세금 마감일, 외우기도 힘든 아이들 학원비….

지난해 일본 아쿠타가와 상을 받은 규슈 출신 여성 작가 다이도 다마키의 소설 『이렇게 쩨쩨한 로맨스』는 그런 의미에서 아주 재밌는 소설이었다. 이런 걸 두고 연애소설이라고 해도 되나, 싶을 만큼 독특했다. 도저히 소설의 주인공으로 등장할 수 없는 사람들이 등장해 시시껄렁하게 잠깐을 살다 사라진다. 바닷가 마을을 배경으로 평범한 한 처녀와 아버지의 친구뻘 되는 노인의 ‘사랑’을 다룬 표제작 ‘이렇게 쩨쩨한 로맨스’에서는 두 주인공의 첫날밤이 이렇게 묘사된다.

“우리는 한번 같이 잔 적이 있는데, 그것이 섹스였는지 아닌지 지금도 잘 모르겠다. 나는 종종 그때의 일을 떠올려보곤 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껌을 씹으며 그때를 회상하고 있다. “빠질 것 같아요”쓰쿠모씨가 안간힘을 쓰는 듯한 목소리로 다급하게 말했다. 지난 주에 일전에 빌렸던 10만엔을 갚으러 만났을 때의 일이다. (중략) 쓰쿠모씨도 그쯤되면 곤혹스러워할 만도 한데 이렇게 나와 여전히 만나고 있다. 창피하지도 않은가.”

소설은 이렇게 우리를 곤혹스럽게 만든다. 세밀한 묘사들이 정곡을 콕콕 찌르기 때문이다. 이 여주인공은 나이든 쓰쿠모라는 인물을 떠나지 못하다가 결국 그와 동거에 이른다. 백화점 반찬 매장에서 일하고 있지만 임시직이고, 아침마다 이불에서 별로 일어날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나이든 쓰쿠모씨는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으며 젊은 그녀를 사랑하고 아끼고 보살펴 준다. 그는 돈도 잘 꾸어주고 꼭 갚으라고도 안 한다. 그는 마을의 중학교 화장실의 변기가 막힐 때마다 그걸 뚫어주는 선행도 하고 있다. 그런 그를 두고 나쁜 소문이 나자 교사들은 학생들에게 말했다. “ 벌써 몇 년 동안이나 묵묵히 그 일을 하고 계시죠.(중략) 그분은 맨손을 변기에 집어 넣어 구멍을 막고 있는 생리대를 꺼냈어요. 과연 여러분이 그런 일을 할 수 있어요? 누구 건지도 모르는 생리대를 맨손으로 집을 수 있어요? ” 그런 마당이니 “정말 이 사람과 다정하게 입을 맞출 수 있을까, 어떻게든 할 수는 있을 거야. 그럼 과연 얼마나 오래 갈까, 날마다 그렇게 할 수 있을까”하는 고민은 시시하고 쩨쩨해져 버리는 것이다.

그는 말하자면 전쟁을 겪고 산업화를 이뤄낸 고마운 일본 구세대의 표상이다. 그는 훌륭하다. 그는 나쁜 소문의 주인공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는 헌신적이다. 그는 “또 돈으로 나를 옭아매려 한다. 고마운 일이다.” 그녀로 말하면 “사실 그걸 좋아하고 사족을 못 쓰기도 한다. ” 게다가 그는 “묵묵히 집안일을 하고 있고 어른스러우며 고상한 사람인” 것이다. 문제는 로맨스가 안된다는 것뿐, 바꿔 말하면 로맨스만 포기한다면 괜찮은 인생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작가는 태연하게 이 게으르고, 적당히 남자를 이용하는 주인공의 손을 들어준다. 도전적이지는 않지만 만만치 않은 눈빛으로 말하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뭐?”. 이는 벚꽃처럼 찬연하고 일본도처럼 푸른 날 선, 정사(情死)조차 미화되는 일본 근대 문학에 대한 도전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쿠타가와 상 심사위원의 말처럼 그녀는 “인간을 확실히 그려낸” 성취를 이룬다. 나는 인간을 바라보는 작가의 냉정한 눈에 박수를 보내고 싶었다.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를 통해 결국은 인간에 대한 따뜻함에 이르고 있기 때문이다.

공지영(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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