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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한 개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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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개혁'과 '진보'는 매력적이다. 잘못된 것을 뜯어 고치거나 앞으로 나아간다는 뜻이니 호감이 간다. 그래서 종종 둘은 형제처럼 가깝게 여겨진다.

하지만 실제 역사 속에서 이들은 갈등관계에 놓일 때가 많았다. 대표적인 게 1979년 보수당 마거릿 대처 총리 집권 때의 영국 상황이다. 그전까지 영국 사회는 노동당의 이상주의가 지배했다. 노동당의 정책은 정부가 경쟁적인 시장세계에 적극 개입해 사회적 약자인 노동자 계급에 부(富)를 재분배, 다같이 잘 사는 복지국가를 완성한다는 것이다.

이런 정책이 수십년 지속되자 자본가는 부를 창출하겠다는 의욕을 잃었다. 일자리는 줄고 실업은 만연했다. 다같이 잘 못사는 나라가 됐다. 한때 다수 국민을 열광케 했던 진보의 이상을 현실이 배반한 것이다. 대처는 이걸 영국병이라고 불렀다.

그는 정권을 걸고 노조의 힘을 도려냈다. 세금을 줄이고 정부예산을 삭감했다. 국영기업을 민영화했다. 금융산업도 개방했다. 온 국민이 고통받는 투쟁의 세월이 5년 흐른 뒤 경제는 침체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현실을 직시한 대처의 정책은 현대사에서 가장 극적으로 성공한 개혁이었다.

대처 집권 뒤 18년 만에 현 토니 블레어 총리의 노동당이 다시 정권을 잡았다. 이때의 노동당은 과거의 노동당이 아니었다. 대처의 시장주의 개혁의 성과를 이어 받았다. 블레어 정권은 과거의 노동당을 시대착오적인 구 좌파라고 규정했다. 신 노동당 정권은 대처가 깔아놓은 개혁의 레일 위를 달리고 있다.

사흘 전 청와대에서 있었던 노무현 대통령과 진보 정당인 민주노동당 지도부와의 치열한 정책토론을 보면서 개혁과 진보가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 대통령은 민주노동당이 개혁정책이라며 요구한 분배 우선주의와 부유세, 아파트 원가 공개를 거부했다. 시장 친화적이지 않은 이런 정책들을 개혁으로 보지 않는다며 뿌리친 것이다. 민주노동당은 자신의 진보를 개혁이라 생각할지 모르지만 역사 속에서 개혁의 대상으로 판명난 영국 구 노동당의 이상주의에만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닐까. 반면 노 대통령이 시장 친화적인 개혁노선을 분명히 한 것은 대처나 블레어처럼 집권자의 투철한 현실인식을 보여준 것이어서 반가웠다.

전영기 정치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