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진(左), 박성훈(右)
두 선수는 고교 시절 에이스였다. 박성진은 최고의 포인트가드, 박성훈은 넘버 원 포워드였다. 둘은 고3이던 2004년 아시아 청소년 선수권에서 중국을 꺾기도 했다. 중국은 박스 앤드 원 수비로 박성훈을 전담 수비해야 했다. 중국의 간판 스타였던 후웨이동은 “중국에도 박성진 같은 포인트가드가 있으면 좋겠다”고 부러워했다.
운명은 갈렸다. 박성훈은 연세대에 입학하자마자 팀의 주포로 자리를 잡았다. 박성진은 중앙대에 가서 고전했다. 당시 장일 감독은 “힘도 체력도 모자란다. 30점짜리 선수”라면서 혹독하게 다뤘다. 강병현(KCC) 등에게 밀려 경기에도 나서지 못했다.
그러나 세상살이 새옹지마다. 대학에서 그들의 실패와 성공은 뒤바뀌었다. 박성진은 인내를 배웠고 박성훈은 자만심을 가진 것 같다.
박성진은 뼈를 깎는 노력 속에서 2년을 보냈다고 한다. 휴대전화도 없을 정도로 농구에 빠져 살았다. 결국 그는 3학년 때 대학 최고 가드로 올라섰고 팀에 52연승을 선물했다. 이번 드래프트에서 모든 감독이 박성진을 뽑고 싶어했다. 박성훈은 연세대에서의 성공을 발판으로 2006년 1월 하와이로 유학을 떠났다. 그러나 한국과 달리 자율적인 미국 농구에 적응하지 못했다. 6개월 뒤 한국에 돌아와서는 반대로 스파르타식 한국 농구를 견디지 못했다. 그러면서 감독과 불화가 생겨 뛸 기회도 잡지 못했다. 유복한 집안의 외동아들인지라 더 그런 것 같다. 2007년에는 6개월여 운동을 그만두기도 했다.
일단 박성훈은 다시 기회를 얻었다. 그는 “대학 때는 나태했지만 프로에서는 고등학생 때처럼 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박성훈이 그럴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그러나 드래프트 꼴찌라는 오명이 오히려 그의 투지를 자극하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
채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