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김구림의 '카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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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1면

시간이 멈춰섰다.대형버스가 운행을 중지하고 타이어는 뽑혀진 채 버스 뒤쪽에 처박혀 있다.그리고 보일러도 불을 끄고 붉은 열기만 벽에 투영돼 있다.더욱이 희미한 가로등 밑 담벽에 기대어 서있는 중년신사가 물고 있는 담배에서는 더이상 연기가 새나오지 않는다. 마치'멈춰'라는 소리를 외친 것처럼 일상(日常)을 정지시킨 사람은 화가 김구림(金丘林.61)씨다.

쉰살을 넘어서부터 모자를 즐겨쓰는 金씨는 화단에서'늙지 않는 아방가르드(전위작가)'로 불린다.60년대에 이미 액션페인팅과 퍼포먼스로 눈길을 끌면서 끊임없이 실험의 영역을 실험해왔기 때문이다.

그가 지난 4월초부터 두 달간 매달려 끝마친 작업이 바로'카페'란 제목의 설치작업이다.

국내에서 선보인 설치작업의 덩치로서는 아마도 가장 클 80여평 전체를 하나의 붙박이 작품으로 꾸몄다.설치장소는 장흥국민휴양지 초입에 있는 토탈야외미술관(0351-40-5791). 넓은 잔디밭 위에 70여점의 조각이 들어서 있는 이 미술관은 입구쪽 매표소부터 그뒤로 20여 떨어진 미술관 본관까지가 지하실로 연결돼 있다.金씨의 작품이 들어선 곳은 바로 이 지하실이다.

“전에 이곳에 왔을 때와는 분위기가 너무 달라 깜짝 놀랐습니다.산도 계곡도 보이지 않고 전부 먹자판이니.이게 뭐하는 겁니까.” 실제로 그랬다.미술관 양편은 물론 이 일대가 횟집.당구장.게임룸.돼지갈비집.러브호텔로 둘러싸여있다.심지어 사교댄스장까지 있다.

金씨가 토탈미술관으로부터 작품을 의뢰받아 현장에 갔을 때 처음 머리에 떠오른 단어가'환경'이었다.환경을'지키자'또는'가꾸자'라는 거창한 구호가 아니라'우리는 이런 것들에 둘러싸여 살고 있다'는 것을 환기해 보자는 것이었다.

작품 '카페'에서 새로운 것이라고는 작가 金씨의 머리속에서 나온 작품구상 정도 밖에 없다.나머지는 전부 폐자재.폐품.중고품들뿐이다.

토탈미술관 앞에 서면 노란 타이어자국이 폐차처분된 버스에까지 이어진다.트롬본을 올려놓은'카페'라는 간판을 단 버스에 들어서면 건축현장에서 떼어온 듯한 파이프와 의미없는 낙서로 가득하다.3개의 계단을 내려가 지하실로 들어서면 그곳은 카페의 모습이다.카운터도 있고 테이블과 의자도 있다.그러나 카운터 위에는 네온파이프가 얼기설기 지나가고 있으며 테이블이 놓여진 천장에는 7개의 중고TV가 매달려 그의 비디오작업을 보여준다.방 하나는 보일러실.녹슨 드럼통들이 벽면을 메우고 한편에는 큰 보일러가 증기를 뿜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또다른 방에는'미술전쟁(ART WARS)'이라고 큼직한 낙서가 휘갈겨져 있고 그 밑에'김구림'이란 영문자가 사인처럼 적혀있다.

그 맞은편 벽에는 파도가 몰아치는 해변의 삭막한 풍경이 가득하며 그 옆으로 녹슨 철판을 구부려 만든 보트들이 마치 보트피어에 세워진 것처럼 줄지어 있다.

쓰다가 버린 것들을 모아'시간을 세웠다'고는 하지만 金씨가 머리속에서 구상한 것은 새 것에 대한 반작용이고 역(逆)반응이다.70년 팬티 하나만 걸치고 국립극장 무대에 올라 몇 시간이고 앉아서 퍼포먼스를 했던 시절부터 金씨의 작업을 관통하고 있는'일상을 낯설게 하기'란 주제의 연속이다.평범한 생활 속에서 무관심한 채 잃고 지내는 것을 정색하고 바라보게 해 삶과 인생의 깊이를 넓혀보자는 작업들이다.

“새 것만 좋은 것은 아니지요.일상생활 속에 널려있는 평범한 것들에서 우리는 얼마든지 많은 것을 느낄 수 있는 겁니다.” 미국 로스앤젤레스 교외에 스튜디오를 빌려 작업중인 金씨는 작품'카페'의 마지막 손질을 마치고 지난 19일 출국했다.토탈미술관측은 80평짜리 설치작업을 효과적으로 보여주자는 의미에서 이 작품을 통째로 카페로 활용할 계획을 세워놓고 있다. 윤철규 미술전문기자

<사진설명>

1설치작업'카페'는 노란 페인트로 칠해진 버스 바퀴자국으로부터 시작한다.2쓰다버린 석탄난로를 가져다 세워놓은 벽위에 'VANDAL(문화파괴자)'이라는 낙서가 쓰여있다.3낙서를 휘갈겨 놓은 폐차된 버스.4짓다만 공사판 같은 카페 안 분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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