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갈하고 날카로운 눈썰미를 만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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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음수율(音數律·음절의 수가 일정한 운율)이 흐트러지지 않고 이미지가 명료하다는 평가를 받아 온 유재영(61)씨가 8년 만에 두 번째 시조집 『절반의 고요』(동학사)를 펴냈다. 다른 시집의 절반 분량이라는 점을 제목에서 내비친 것일까. 불과 30편의 시조들이 3부로 나뉘어 실려 있다.

이씨는 ‘시인의 말’에서 본격적으로 ‘절반’을 거론한다. “당신 시의 나머지 절반은 무엇”이냐고 스스로 묻고 나서 “어둠 속에서도 칼끝처럼 파란 고요” “절망 속에서도 눈물처럼 부드러운 고요” “아무리 두드려도 구부려지지 않는 고요”라고 답한다.

‘세 고요’를 유씨의 시론(詩論) 또는 유씨로 하여금 시조를 쓰게 만드는 화두쯤이라고 본다면 시인의 말에서 언급되지 않았던 처음 절반은 언젠가 시인의 마음 밭에 뿌려졌다가 시조로 싹이 튼 체험·기억·장면 같은 것들일 게다. 오동꽃·모과·비파강·우포늪·성묘·분청사기 같은 시적 소재가 그것들이다. 3부에서 소재는 뒤꿈치가 예뻤던,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첫사랑으로 한정된다.

이런 분류보다 중요한 것은 시편 안으로 풍덩 뛰어드는 일이다. 정갈하면서도 어둠을 밝히는 칼날처럼 날카로운 시인의 눈썰미를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자벌레가/기어가면/한 오분쯤/걸릴까//별과 별/사이에도/등이 파란/길이 있다//조그만/소년 하나가/말끄러미/쳐다보는,”(‘윤동주’ 전문). 시조 안에 직접적인 언급이 없지만 조그만 소년은 물론 요절 시인 윤동주일 것이다.

시인은 백토로 빚은 분청사기 접시에서 “후, 불면 날아갈 듯 그 사랑 눈빛”을 느끼는가 하면 “나긋한 허리둘레로 저리 가쁜 숨소리”를 토해 내는 관능을 눈치 채기도 한다(‘계룡산 귀얄무늬분청사기’ 중).

신준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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