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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산업 규제, 해외 진출로 풀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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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말레이시아 발전의 상징인 페트로나스 타워는 한국 건설회사가 시공했다. 한국 건설업계의 세계적 시공 능력을 입증하는 건물이다. 엔지니어링 설계영역에서 세계 최고로 평가받는 오브 아럽사 정도의 창의적 기술을 갖춘 것은 아니지만 시공 능력에서만큼은 한국 건설사들이 세계 1, 2위를 다투고 있다. 오브 아럽은 시드니 오페라하우스나 파리 퐁피두센터 같은 기념비적 건축물은 물론, 전 세계 공항과 고층 건물의 80% 이상을 설계한 회사다.

한국 건설회사들이 처음부터 이런 시공 능력을 가졌던 건 아니다. 세계 진출에서 활로를 찾은 결과다. 만일 이들이 한국 내에서의 경쟁에 안주했더라면 정부 관료의 보신주의와 부정, 그리고 형평의 덫에 걸려 제대로 기술력을 축적하지도 못하고 주저앉아 버렸을지 모른다. 결국 국가경제에도 보탬이 되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다행히도 건설 부문의 초과 공급으로 인한 과잉 경쟁을 창의적으로 극복하기 위한 소수의 천재적 기업가의 노력으로 중동 건설시장에 진출한 것이 주효했다. 건설사들은 성실과 헌신으로 시행착오를 거듭한 끝에 세계 최고의 기술을 습득하고 발전시켜 지금의 수준에 도달했다. 열사에 뿌려진 땀과 열정으로 습득한 고도의 기술력을 바탕으로 높은 부가가치를 창출해 국민을 먹여 살리는 산업으로 건설업은 자리 잡았다.

이에 비해 한국의 의료산업은 어떤가. 지난 30~40년 이상 우리나라는 사회에서 상위 1% 이내에 드는 가장 우수한 인재를 의과대학에 공급해 주었다. 그런데 이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빌 게이츠의 말대로 1%의 천재가 나머지 사회 구성원을 책임지고 있는지 우리 사회는 묻고 있다. 답은 ‘아직은 아니다’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무엇을 했는가.

그동안 각 의과대학 의사들은 끊임없이 외국으로 배우러 나갔다. 거기서 자신이 평생 전공해야 할 과목을 세계 최고 수준의 초(超)전문가들로부터 배웠다. 그리고 한국에 돌아와 그들의 의학 수준에 다가가기 위해 모방했다. 모방은 창조를 낳기도 했다. 시험관 아기, 간 이식, 위암 치료 등 여러 의료 기술은 이미 세계 최고 수준을 웃돌고 있다.

전반적으로 한국 임상의학은 세계 최고로 평가받는 미국·유럽의 85% 수준에 다가섰다(2005년 대한의학회). 건축 시공능력과 마찬가지로 임상의학의 실천 수준은 거의 세계 최고 수준이다. 의료 서비스 제공과 국민의 이용 만족도를 살펴봐도 저비용·고효율의 건강보험제도 운영 역시 수준급이다. 물론 신약을 개발하고 의료기기를 개발해 국부(國富)를 책임지기에는 역부족이다. 상위 1% 인재들이 집중된 분야에서 임상의료의 실천 수준이 외국에 비해 높다고, 그리고 국민의 의료편의가 다른 나라에 비해 월등히 높다고 만족해서는 안 된다. 필수 의료 서비스는 국민의 기본권으로 제공하면서 의료를 새로운 ‘산업의 쌀’로 만들어 부가가치를 창출해야 한다. 그것이 우수한 인재가 모인 의료계가 할 일이다.

한 대학병원은 규제의 덫을 피해 1998년 미국 뉴욕에 진출, 2002년 로스앤젤레스(LA)에 불임센터를 개설하고 흑자경영을 이어오고 있다. 2005년에는 기업 변호사, 노사 변호사 등 10명의 변호사로 구성된 인수팀의 지원으로 1년 반의 인수협상 끝에 LA에서 가장 큰 병원 중 하나인 LA 장로병원을 인수하기도 했다. 정상 가격의 20%에 불과한 가격으로 병원을 인수한 뒤 지배구조 개선과 철저한 현지화를 통해 3년 만에 흑자로 전환시켰다.

한국에서는 경험할 수 없었던 병원의 지배구조, 건강보험의 다양성, 자본투자의 다양성, 의료 공급 보장을 위한 국가와 지자체의 재정투자 등을 잘 조합하는 엄청난 경험을 축적한 것이다.

한국 대학병원이 미국 두 번째 대도시의 가장 큰 민간 병원을 인수해 영리와 공익의 조화를 이루면서 어떻게 성공할 수 있는지 보여준 것이다. 이 병원의 성공 사례는 한국에서는 이념과 규제의 덫에 빠져 아무것도 할 수 없었지만 해외 시장에서는 가능할 수 있다는 증거다.

세계경제와 함께 미국 경제도 어렵다. 그래서 싼값으로 인수합병할 수 있는 기회도 열리고 있다. 국내에서의 각종 제약 때문에 이룰 수 없었던 것들을 해외에서 먼저 이룬 뒤 한국으로 역수입하는 방식으로 의료의 산업화를 이뤄낼 수 있다고 본다. 정부는 해외 환자 유치와 제약산업 육성과 함께 병원산업의 해외 진출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봐야 할 것이다.

손명세 연세대 교수·보건대학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