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아버지'와 '폴링다운'을 보는 착찹한 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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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4면

쯧쯧.사내가,그것도 아버지가 고개를 숙이고 살다니….고용불안 시대에 스트레스받던 일부 대중은 홧술 마시는 기분으로 고개숙인'아버지'를 대량 소비한게 아닌지.김정현의 소설로,장길수의 영화로.소설이 1백60만권이나 팔렸고 영화흥행은 좀 시원찮았지만 이젠 연극도 나온다는데…. 신드롬이 돼버린'고개숙인 아버지'.사회변화속에 직장과 가정 모두에서 지배적 힘과 우월한 지위를 잃어버린 서글픈 남자,즉 상실된 남성성이 그 핵심인 듯 싶다.보다 세련되게 고개숙인 남자 이야기를 들려주는 대중물이 하나 있다.얼마전 극장 개봉에 이어 최근 비디오로 출시된 조엘 슈마허 감독의 미국 영화'폴링 다운'.이 아버지는 좀 과격하다.전통부재와 무질서한 사회상에 시달리다 그 불만을 폭력으로 분출해버리니까.서구의 미디어학.문화연구.사회학 연구자들이'남성상실'의 사회에 대한 메타포라며 줄이어 연구의 도마에 올리는 이 영화의 실체는 뭔가. 영화.더위속에 꽉 막힌 로스앤젤레스 샌타모니카 고속도로.짜증이 운전자들의 무질서를 낳고,디펜스(D-Fence)라는 번호판의 차를 몰던 이름 모를 백인남자가 아예 걸어 가겠다며 차를 버린다.딸의 생일이니 집에 빨리 가야 한다며….영화 끝까지 그의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그러니 번호판대로 디펜스라고 부르자. 그는 불쾌한 일만 당한다.물건 안 사면 동전 못 바꿔주겠다는 가게 주인,메뉴판에 붙여놓은 사진보다 훨씬 못한 음식을 내놓는 식당 종업원,거기다“통행료를 내라”며 시비 거는 불량배들,동성연애하자는 네오나치주의자.“내가 충성을 다했던 미국은 더이상 힘과 질서로 상징되던 그 나라가 아냐,젠장.”디펜스의 분노는 폭력으로 표출된다.집으로 가는 길에 싸우면서 얻은 무기가 야구방망이.칼.자동소총을 거쳐 로켓포에 이름에 따라 자신감은 더욱 증폭되고…. 그 즈음 사건을 추적하던 경찰은 디펜스의 정체를 파악한다.무기회사에 다니다 냉전완화 이후 감원됐으며,불안한 심리를 가족폭행으로 풀다 이혼당하고 법원에 의해 아내와 딸에 대한 접근조차 금지된 사람임….마지막 순간 디펜스는 은퇴하는 날임에도 목숨 걸고 자신을 추적한 형사 프렌더개스트와 마주선다.이 노형사는 이미 권총도 반납했지만 범인추적이 자신의 일이라고 여겨 스스로 나선 것이다.그런 그는 디펜스에게“너의 아버지 자격을 앗아간 것은 바로 너 자신이었다”고 일갈한다.“힘을 잃는게 문제가 아니라 힘이 있을때 어떻게 사용했던가를 생각해보라”는 것이다.둘의 기싸움은 주인공의 패배로 끝난다.

이제 이 영화에서'아버지'를 찾자.먼저 남자의 의식세계를 살펴보고.남자들은“할일도 많다는'싸나이'로 태어났으니 싸움에는 천하무적,사랑은 뜨겁게 하면서 영광에 살아야 한다”고 교육받지.그 결과'사회는 곧 남성이며 가정은 여성'이라는 생각에 빠지기 일쑤고….그래서 남성은 질서있는 사회를 만들고 유지하는 역동적 주체고 여성은 남자가 보살피고 지배해야할 대상으로 여기고 산다.

디펜스도 그렇다.그는 이기적이고 비겁한,남성적이지 못한 사람들 때문에 힘의 나라 미국이 무질서해진 것으로 본다.그래서 폭력으로 사회에 맞서면서 자신의 소유라고 여기는'집'으로 다가간다.

하지만 프렌더개스트 형사의 생각과 행동은 다르다.불안증세로 자신을 괴롭히는 부인을 항상 웃음으로 안으며 경찰에서는 마지막까지 임무에 충실하다.“나같이,식물같이 위치를 지키는 사람이 있어야 세상이 유지되는 게 아니냐”고 말하며….'남성다움'에 연연하지 않고 인간으로서 조용히 할 일을 다하는 스타일-. 남자의 힘을 잃은 두 사내의 서로 다른 두 길.여기서 영화는 진정 가치있는 삶의 원천은 지배력이나 자존심 같은 남성성이 아니고 함께 어울려 사는 휴머니즘 정신임을 말한다.

이제 우리 이야기로 돌아오자.아버지 신드롬은 힘과 질서라는 남성적 힘에 대한 향수를 낳았다.그렇다면 최근의 박정희 추모열기도'아버지'신드롬의 연장선이라고 볼 수 있다.

정부의 실정이 박정희 신드롬을 낳았다지만 따지고보면 오늘날의 아버지가 잃어버렸다는 것의 내역과 지금의 정치권력에서 결여됐다고 비판받는 항목이 동일하지 않은가.따라서 박정희 향수는 가부장제적 남성에 대한 빗나간 예찬의 한 형태라고 할 수 있다.고용불안의 시대가'아버지'를 타고 힘과 가부장제 사회에 대한 향수로 엉뚱하게 진화한 것은 아닐까. 채인택 기자

<사진설명>

마이클 더글러스가'버림받은 아버지'로 열연하는'폴링다운'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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