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의 역사] 80. 유언<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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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 대관령 목장에 앉아 상념에 사로잡혀 있는 필자.

"인생이 무엇입니까?"

누가 나에게 묻는다면 나는 담배연기 훅 뱉으며 대답하리라.

"위로 먹고 아래로 배설하는 것이지." 배설이 너무 고급스러운 말인가? '싸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정직한 표현인가.

"한 가닥 구름 이는 것이 태어남이요. 사라지는 것이 죽음이라."그 쪽이 훨씬 훨씬 품위가 있는가.

약동하는 왕성한 생명들을 본다. 따지는 것 많고, 요구하는 것 많고, 싸움질하는 것 많지만 결국 돌아가는 곳은 "먹고 싸는 것"인 것 같다. 그 과정이 꽤 간다. 그것이 인생이다. 별 것 아니다. 그 별 것 아닌 것을 보내면서 사람들은 불안에 떨 때가 많다. 그 불안을 크게 덜면, 인생은 그렇게 비관할 것만도 아닌 것 같다. 강국이 어쩌고 사상이 어쩌고 이 세상이 시끄럽지않은 날이 없지만, 21세기가 되어도 인간들은 기가 막히게 멍청하다. 인간은 "잠자리 편한 것이 최고의 행복"이다. 그 평화야말로 최고의 가치다. 애국도 아니고 첨단 무기도 아니고 강자 노릇하는 것도 아니다. 각자가 누릴 수 있는 가장 행복한 경지는 '마음의 평화'다. 그것은 누가 주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자각하는 것이다.

인간은 모두 자기 그릇의 크기를 알아야 한다. 그 크기에 알맞은 짓을 해야 한다. 무리를 할 때 불행을 느낀다. 그릇이 작은데 엄청난 돈을 안기면 다 쏟아진다. 기초가 돼 있지 않았는데 높이 높이 올라가면 떨어진다.

남을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들은 기쁨을 맛볼 기회가 적다. 비록 가난하고 헐벗은 처지라도 마음이 훈훈하고 편안하면 그것이 최고의 행복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고 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이 80여년 간 살아본 결과 얻은 철학이다. 결혼식 주례를 서면 나는 꼭 한자 써준다. "남에게 기쁨을 주라. 행복하니라."

인생이 무엇이냐? 봐스 이스트 레벤? "인생은 먹고 싸는 것"이다.

대관령 큰 목장 초원에 앉아 대우주를 내다 보았다. 유연하구나. 구름이 흘러온다. 그리고 흘러간다. 쳐다보고 있노라니 눈물이 주룩 흘러내린다. 아무것도 아닌 것을… 저 산천 초목의 일부인 것을… 대자연의 조그만 굴레의 하나인 것을… 나는 한 조각의 구름으로 태어났다. 흘러왔다. 이윽고 사라질 것이다. 죽음? 언제든지 오라, 신이 주는 마지막 선물로 알고 조용히 받아들이리라.

서귀포 앞바다를 내다보는 언덕에 앉아 있었다. 무한대의 바다 저 끄트머리에 하늘인지 바다인지 분간이 안가는 희미한 선이 있다. 구름과 바다가 만나고 있는 곳인가.

어느날 나는 항구에 내려가 보트 한대를 빌리리라. 엔진을 걸고 나가리라. 자꾸만 자꾸만 나가리라. 수평선을 향하여 나가리라.

구름이 나를 반기는가. 사랑하는 구름이여! 나하고 같이 가자! 끝없이 끝없이 나하고 같이 가자!

<끝>

한운사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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