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가 박건호의 겨울 산사 풍경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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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호 14면

1.푸른 숲, 푸른 바다 : 전북 부안 내소사
내소사에는 단청이 없다. 여름과 가을에는 변산의 빨주노초 나뭇잎이, 겨울에는 하얀 새벽 안개와 설경이 목재 본연의 연갈색과 국보 꽃창살에 어우러져 오히려 단청이 화려한 산사보다 아름답다. 얼핏 보면 밋밋한 이곳을 겨울에 찾게 되는 이유는 전나무 길에 숨어 있는 봄 때문이다. 겨울의 회색 하늘과 앙상한 가로수에 지쳐 있다면 일 년 내내 푸른 내소사 전나무 길에서 봄을 살짝 맛보고 오자. 변산반도를 따라 펼쳐진 파란 바다와 하늘, 눈부시게 부서지는 파도와 하얀 등대도 운치를 더한다.

2.따스한 겨울 오후의 햇볕 : 전남 구례 구층암(화엄사)
겨울은 본래 정(靜)의 계절. 동식물이 활동을 멈추고, 농가는 조용하다. 생각이 무르익고 김장이 소리 없이 숙성하는 이때, 도시는 겨울도 없이 바쁘게 돌아간다. 겨울의 행복 중 하나라면 단연 따스한 햇볕이 드는 오후의 여유 아닐까? 웅장한 화엄사 뒤로 하늘거리는 대나무 숲길을 따라 몇 분만 걷다 보면 옛 암자의 모습을 가장 잘 간직했다는 구층암이 나온다. 자연 그대로의 모과나무 기둥과 볕이 잘 드는 마루에 기대 잠시 눈을 감고 앉아 겨울 산사의 여유를 느껴 보라.

3.겨울 새벽의 고요함 : 충남 공주 마곡사
태화산 깊이 굽이굽이 흐르는 냇물을 끼고 앉은 마곡사의 아침은 그 정갈함이 겨울에 절정을 이룬다. 칠흑 같은 겨울 새벽, 김구 선생이 은거했던 웅진전의 주황색 불빛이 향나무를 은은히 비추면 극락교 아래로 흐르는 마곡천 잉어떼 그림자도 갈대처럼 오간다. 콧속을 찌르는 매운 새벽 산바람을 맞으며 만물을 깨운다는 범종이 28번 메아리치는 소리를 듣노라면 몸은 춥지만 산속의 고요함과 평온에 마음은 훈훈해진다. 마곡사를 한 바퀴 따라 도는 등산 코스도 개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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