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중앙 시평

‘98년 외환위기 극복’ 벤치마킹하자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3면

11년이 지난 2009년 초 또다시 경제 불황의 쓰나미가 엄청난 양과 속도로 몰려오고 있다. 수출, 소비, 투자 가릴 것 없이 푹 가라앉으면서 지난해 4분기 성장은 마이너스 5.6%를 기록했다. 이런 추세라면 또다시 기업 파산이나 가계 부실, 실업 대란이 잇따를 게 뻔하다. 춥고 힘든 시기가 곧 닥칠 것이다. 최근 만난 한 대기업의 부회장은 “깜깜한 터널 속을 헤매는 분위기다. 올해 내내 이럴 것 같다”고 말했다. 누가 봐도 지금은 외환위기 때보다 더한 최악의 상황이다. 그 때문에 내수경기 회복과 수요자의 구매심리 진작을 위해 외환위기 당시보다 더 포괄적이며 과감한 특단의 대책 마련이 절실하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지 당시 대책을 면밀히 살펴보고 재활용하는 일엔 소홀한 듯하다. 비싼 대가를 치르고 얻은 경험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외환위기 때는 경제회복을 위해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했고 상식을 초월하는 내용도 많았다. 이것저것 가릴 때가 아니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늘 “선제적으로 했다”고 하지만 반걸음 늦는 현 경제위기 대책과는 사뭇 달랐다.

주택시장 대책이 좋은 예다. 미분양 주택이 25만 호(주택업계 추정)에 달하는 등 주택시장은 요즘 아사 직전이다. 건설사의 유동성 위기 극복대책이 잇따라 나왔지만 거래활성화 방안이 없어 주택시장은 살아나지 않고 있다. 무엇보다 노무현 정부가 부동산시장에 대못을 워낙 깊게 박아놓았다. 13차례나 규제 방안을 내놓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너무 과도한 부동산 규제”라고 지적했을 정도다. 신훈 한국주택협회장(금호아시아나 건설부문 부회장)은 “잦은 부동산 규제로 시장이 얼어붙은 데다 금융위기의 직격탄을 맞아 주택시장은 완전 그로기 상태”라고 진단한다.

이에 따라 주택업계는 외환위기 때 내놓았던 주택시장 활성화 방안이라도 마련해 달라고 정부에 여러 차례 건의했다고 한다. 국민주택 규모 이하의 신축주택을 구입한 뒤 되팔 때는 5년간 한시적으로 양도세를 면제하고, 1세대 1주택자들에게도 양도소득세 비과세 보유 요건을 한시적으로 완화해 달라는 게 그 핵심이다. 3년 이상 보유에서 1년 이상 보유로 기준을 낮춰달라는 것이다. 전매 제한과 분양가 규제를 완전히 풀고 60~85㎡의 신축주택을 살 때는 취득·등록세를 25% 감면해 달라는 내용도 들어 있다. 업계는 또 신규주택을 분양받는 사람에게 중도금 대출을 지원하고 건설업체에 대한 보증지원을 확대해 달라고 요구한다.

하지만 현 정부는 선뜻 나서질 못하고 있다. 그간 부동산값이 많이 오른 탓도 있지만 이른바 국민정서법을 너무 의식하고 있는 듯하다. 종합부동산세를 대폭 손질해 ‘부자를 위한 정부’라는 비난까지 받았던 터에 세금을 깎아주면 야당이나 시민단체의 반발이 너무 클 것으로 예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욕을 먹더라도 정부가 할 일은 해야 한다. 이대로 가다간 건설업체가 줄줄이 초상날지 모르는 판에 더 머뭇거릴 여유가 없다. 후유증이 우려되면 한시적으로 시행하자. 주택산업은 관련 산업과의 연관 효과가 크고 일자리도 많이 만든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다양한 중소기업 지원대책도 벤치마킹할 필요가 있다. 김대중(DJ) 정부는 중소기업 자금난이 극심하자 98년 1월 신용보증기금과 기술신보에 출연해 중기 보증 지원을 대폭 확대했다. 중기 수출입 관련 금융에 대해 특별보증도 실시했다. 정부가 팔을 비틀긴 했지만 금융업계도 적극 동참했다. 98년 2~3월 중 만기 도래하는 50조원 규모의 기업어음(CP)을 2개월간 추가 연장해줬다. 특히 중소기업의 운전자금 25조원에 대해 상환을 6개월 이상 연장해주고 수출용 원자재 수입신용장 개설 시 신용보증기금이 지급보증해줬다. 그랬더니 부도 업체 수가 현저히 줄어들고 경제는 신속하게 안정을 되찾았다.

이런 대책들을 포함한 비상대응책을 조속히 만들어야 한다. ‘좋은 약은 자주 달여 먹어야 한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박의준 경제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