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포커스>배신당한 6월항쟁정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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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한국이 군사정부의 터널을 벗어났다.민주투쟁의 위대한 승리다.'10년전 프랑스의 르몽드지 앙드레 퐁텐 사장(당시)의 찬사가 귓가에 맴돈다.국제 언론은 6월항쟁을'시민봉기의 승리'라고 극찬했었다.

6월항쟁은 우리 시민의 민주와 평화주의 정신을 국제사회에 널리 알렸다.그후 10년,6월항쟁은 프랑스혁명,마닐라의 민중혁명과 동구의 민주혁명등 시민혁명과 달리 시민봉기로 평가되는 것같다.군정 연장으로 민주체제 이행이 실현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지난 10년동안 세계 도처에서는 엄청난 변화가 있었다.89년 11월에는 베를린장벽이 무너져 현존 사회주의가 몰락했다.상전벽해(桑田碧海)와 같은 대변화였다.독일이 통일되고 옛 공산지역에 민주체제가 들어섰다.남아연방에는 흑백공존 정부가 등장했고 중동에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간 평화체제도 출범했다.15개 서구나라들은 민주와 시장경제의 동질성을 기초로 국경을 허물어 유럽통합을 진전시켰다.이러한 변화는 시민의 요구를 정치권이 실현한 정치걸작이다.

6월항쟁은 국제변동의 원리인 민주.평화.통합주의를 우리 정치권에 제시하고 현실속에서 실현할 것을 희망했다.우리 시민은 현명하게도 군사독재나 스탈린식 전체주의,또는 파시즘으로는 선진국 진입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그래서 5공(共)독재와 싸워 군사정권에 저항했던 것이다.정치권이 항쟁의 여망을 실현했다면 오늘 한국의 모습은 크게 다를 것이다.

그러나 오늘 우리 사회는 부패.폭력.분열이 판치는 전근대성의 늪에서 헤매고 있다.한국은 지난 10년간 민주화 도상에서 부패.지역주의.무질서의 덫에 걸려 전진할 수 없었다.이것은 정치권이 6월항쟁 정신을 외면했기 때문이다.비폭력 평화주의는 쇠파이프와 화염병으로 무장한 한총련이 살인까지 범함으로써 유린당했다.대통령 차남의 국가기관에 정치마피아 심기와 비리,국회의 날치기 관행,한보게이트와 대선자금 문제등은 6월정신을 배신한 증거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한국의 지난 10년은 변화보다 정체와 표류의 시기였다.우리 정치권은 이미 87년 대선때 사실상 6월정신을 배신했다.그래서 처음부터 민주 이행의 궤도를 이탈했다.YS(金泳三대통령)와 DJ(金大中국민회의총재)가 후보단일화에 실패함으로써 군정을 연장시켰기 때문이다.민주투쟁세력의 분열은 지역갈등을 더욱 심화시켜 정치무질서라는 고질병을 낳았다.민주세력은 개혁정당으로 뭉쳐야만 6월정신을 계승해 민주 이행에 성공한다는 항쟁정신을 배반했다.그후 YS는 군정세력과 야합(3당합당)함으로써 체제이행을 결정적으로 혼란에 몰아넣었다.

이러한 정치왜곡 현상은 국민축제가 되어야 할 6월항쟁 10주년을 허망하게 만들었다.정치체제 이행은 동구 공산권이 한국정치를 추월했다.폴란드.헝가리.불가리아와 루마니아까지 정치질서를 안정시켜 이미 좌우 양파가 정권교체에 성공했다.이들은'정치안정 없이 경제.사회발전은 없다'는 헬무트 콜 독일 총리의 말을 현실에 충실히 적용했다.보수 일색인 한국판 지역구도는 개혁대 보수간 정책경쟁을 차단해 정치혼란을 증폭시켰다.이념.정책.가치관의 차별성 없는 지역구도는 돈정치를 만연시킬 수밖에 없다.이러한 정치 무질서는 계층.도농(都農).세대간 균열을 악화시켜 사회무질서를 조장해 국민통합을 저해하고 있다.현재 신한국당 8마리 경주마(競走馬)의 경선 혼탁상은 정치 무질서의 실상을 반영한다.

구미 선진권뿐만 아니라 세계는 7년전 냉전을 끝내고 역사단계로서의 20세기를 벗어나 21세기를 향해 질주하고 있다.그런데 우리는 지역대결과 남북간의 이념적 대치와 긴장에서 보듯 냉전속에서 표류중이다.지역구도와 정치무질서가 역사발전의 발목을 잡아 경제.사회 발전의 전진을 가로막고 있다.'오늘같은 정치를 위해 6월항쟁을 하지 않았다'며 배신감을 삭일 때가 아니다.우리만 냉전에 매몰돼 주저앉을 수 없다.제2의 6월항쟁으로 지역구도의 정치를 허물어 정치질서를 바로잡아야 한다.그러나 이번에는 시위가 아니라 대선시 한표의 주권행사를 통해 주인의 함성을 울려야 한다.여기에 20세기를 벗어나는 단서가 있다.

주섭일 국제문제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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