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세대에 인기끄는 복고풍 리메이크, 그매력의 비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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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2면

초등 학생 딸애 방에서 새어나오는 가락이 30대후반 회사원 허모씨에게도 낯익다.“내 사랑하는 그대여 정말 가려나…그대로 그렇게 떠나간다면 난 정말 어떡하라고….”따라서 흥얼거리려니까 깜짝 놀란 것은 딸애다.“아빠가 박진영노래도 알아?”박진영,그게 누군데? 그러고 보니 반주에서 나는 맛이 다르다.그 옛날 78년도 피버스(열기들) 노래와 달리 쿵쿵짜짜,쿵쿵짜짜 하는 리듬이 몸을 좀 흔들어도 괜찮을 분위기다.

이런게 소위 리메이크인가보지.딸애 음반을 살펴보던 허씨는 좀 당혹스럽다.산울림의'아니 벌써'가 웬 하모하모의 노래? 디제이 덕의'여름이야기'는 뜬금없이 중얼대는 가사와 달리 가락은 왕년에 장미화가 부른'헬로와'와 똑같지 않은가.하지만 이 복고에는 수상쩍은 면이 없지 않다.왜 멀쩡한 노래를 댄스곡 분위기로 만드는 거지? 댄스곡에 맞게 요란스런 곡을 주로 고르는건 또-.“꼭 그런 건 아니에요.” 회식자리에서 늘어놓은 허씨의 불평에 20대 신입사원이 반례(反例)를 줄줄이 대며 이의를 제기한다.공일오비의'슬픈인연(나미)',노영심의'그리움만 쌓이네(여진)',봄여름가을겨울의'미인(신중현)',신효범의'님아(펄시스터즈)'…. 듣고보니 그렇다.예가 조관우 2집,'님은 먼 곳에(김추자)''꽃밭에서(정훈희)''당신은 모르실거야(혜은이)'같은 복고(復古)곡으로 메워진'메모리'앨범에 이르자 비로소 감이 잡힌다.10대 취향이 평정(平定)하고 있는 가요시장에 드물게 나오는 성인용 상품.허씨는 뒤늦게 산 조관우2집을'김수희베스트'와 나란히 운전석 앞에 꽂아두면서 한마디한다.“아니,보브 딜런 판은 60년대 것부터 차례로 있는데 80년대 김수희는 왜 베스트앨범밖에 없는 거야.” 음반시장에서는'흘러간 노래'대접이 시원치않지만,아닌 세상도 있다.나훈아의'영영'이 노래방 18번이라는 대학생 방성희씨의 말.“노래방에선 댄스 아니면 뽕짝이죠.괜히 분위기 깨는 어중간한 발라드보다 다같이 부를 수 있는 뽕짝이 낫죠.” 그 덕에'왕년에 부르던'노래로 복학생'아저씨'가'오빠'로 뜨기도 한다.이 세대의 레퍼토리는 비교적 신곡인'찬찬찬'에서'달타령''돌팔매''아빠의 청춘''노란샤쓰의 사나이''남자는 여자를 귀찮게 해'까지 종횡무진. 음반을 통해 듣고 배운 경우는 드물고 가사까지 친절히 일러주는'가요무대'도 그다지 애청하진 않는다.대신 노래방의 두툼한 데이터베이스가 훌륭한 교사다.'친구가 부른 걸 듣고''실수로 번호를 잘못 눌러'등등 배우게 된 계기는 여러가지.다만 노래방에서 히트치는데 필요한 조건,즉'빠른 노래,재미있는 가사'가 공통적이다.

그러나 단지'재미'만은 아니다.방씨는“그 시절엔 서태지 인기를 능가했다”는 나훈아의 명곡(名曲)을 진지하게 부를 만큼 좋아하고'커피 한 잔'의 그야말로 복고적 분위기도 좋아한다.“넥스트가 불렀잖아요.옛날노래란 거 나중에야 알았어요.누구라더라.”가수 펄시스터즈나 작곡자 신중현이 기억에 없는 세대에게도'흘러간 노래'는 나름의 경쟁력을 지니고 있음을 확인케한다.

가수 본인의 말을 들어보자.10대 시절을 미국에서 보낸 박진영씨.“'그대로 그렇게'가 나왔을 땐 전 여기없었으니까 몰랐지요.몇달전 카페에서 나오는걸 듣고,아 참 좋다 싶어 곡목을 물어봤죠.” 이 옛날 노래가 왜 좋은 걸까.“사람만나고 헤어지는 거 예나 지금이나 같잖아요.만나면 행복하고,헤어지면 슬프고.”'영원한 사랑'의 신화가 흘러간 노래를 되살리는 마법이란건가.“가사가 좋지요.직설적이고 소박하고.아니,그보다는 촌스럽고,단순하죠.” 반주가 워낙 복잡한 기계음으로 들끓는 요즘 노래에는 가락과 가사의 이 단순함.촌스러움이 오히려 좋은 짝이란 설명이다.“만드는 사람입장에선'어!이거 낯익다'하고 사람들 귀를 잡아끌 수 있는 것도 굉장히 매력적이지요.안전하니까.” 때로는 이'안전'을 불안하게 뒤흔들 수 있는 것 역시 흘러간 노래의 미덕이다.'멍키헤드'는 김수희의'남행열차'를 앞머리에 국민체조 음악을 붙여 헤비메탈로 부른다.'삐삐밴드'의'붕어빵'음반에서는'커피한잔''개구쟁이''가지마오'를 여성보컬 이윤정의 째지는 목소리로 들을 수 있다.

김수희.펄시스터즈.산울림의 원곡이 훨씬 낫다고? 그럴 수도 있겠다.어쨌거나 지금은'슬픈인연'의 청승 뚝뚝 떨어지는 순정과'신인류의 사랑'의 반(反)순정을 같은'공일오비'노래로 즐길 수 있는 시대.중요한 점은'흘러간 노래'는 그저 흘러가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후남 기자

<사진설명>

신중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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