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권은행장들 “구조조정은 기업 경쟁력 강화에 무게 둬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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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 구조조정은 이제 시작일 뿐이다. 김종창 금융감독원장은 20일 “구조조정은 기업을 살리는 쪽에 무게를 둬야 한다”고 말했다. 이제부터는 기업을 살리기 위한 지원이 신속히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한 것이다. 채권은행장들도 "경쟁력 강화에 무게를 둬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시중은행장들이 20일 서울 명동 은행회관에서 112개 건설·조선업체의 신용위험 평가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왼쪽부터 김정태 하나은행장, 이종휘 우리은행장, 강정원 국민은행장, 신상훈 신한은행장. [연합뉴스]


◆성공사례 나와야=주채권은행들은 기업이 워크아웃을 신청하면 곧바로 채권금융기관협의회를 소집해 워크아웃 절차 개시를 선언하고, 두 달 내에 실제 워크아웃 여부를 최종 결정한다. 문제는 금융회사들 간에 의견이 엇갈리는 경우다. 이미 워크아웃 절차가 진행 중이던 C&중공업의 경우 은행과 보험사들은 이견 조정에 실패하는 바람에 D등급을 받았다.

건설업체도 사정이 비슷하다. 금감원에 따르면 12개(D등급 1개 포함) 건설사에 대한 구조조정으로 ▶은행이 1조2100억원 ▶저축은행 2400억원 ▶기타 2000억원의 손실이 발생한다. 신규자금 지원 때는 이 비중에 따라 각 금융사가 부담을 나눠야 한다. 그러나 자금사정이 넉넉지 않은 저축은행들이 이를 부담하기는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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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식 연세대 교수(경제학)는 “선제적 구조조정이 성공하려면 워크아웃의 성공 사례를 빨리, 많이 만들어내야 한다”며 “정부와 채권단이 워크아웃의 조기 졸업을 위해 가능한 정책수단을 총동원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일부에선 D등급 기업의 개수가 너무 적다고 시비를 걸기도 한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이런 주장을 매우 위험하다고 지적한다. 지금은 한꺼번에 대대적인 구조조정을 할 때도 아니고, 그럴 만한 여력도 없다는 것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 중견기업의 임원은 “구조조정을 일단 시작한 것만으로도 상당한 의미가 있다”며 “시장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살펴 가며 완급을 조절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자금 늑장 지원 차단=채권은행들은 이날 B등급(일시적 자금부족) 기업은 발표하지 않았다. 그러나 건설·조선 업종 자체가 어려움을 겪고 있기 때문에 일부 대기업을 제외하곤 대부분 B등급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강정원 국민은행장은 “B등급 중에서 C로 떨어질 기업이 있을 수 있다”고 말했다.

결국 제때 은행이 자금을 지원해 주지 않는다면 B등급도 결코 안전하지 않다는 것이다. 채권은행들은 향후 B등급 기업이 지원을 요청할 경우 회계법인의 실사를 통해 지원 여부와 규모를 정할 계획이다. D건설의 재무 담당자는 “주채권은행이 기업 사정을 빤히 알고 있는데 또 무슨 외부기관에 실사를 맡긴다는 것인지 알 수 없다”며 “그러다 필요한 때 지원받지 못한다면 누가 책임질 것이냐”고 되물었다. 금감원은 금융회사들의 늑장 지원을 막기 위해 B등급 기업이 6개월 내에 C로 떨어질 경우 책임을 묻겠다고 했다.

◆2차 구조조정도 예정=금감원은 2월부터 건설·조선 업체에 대한 2차 신용위험평가를 할 계획이다. 건설의 경우 시공능력평가 101~300위 기업 중 주채권은행의 총 대출이 50억원 이상인 업체가 대상이다. 조선은 1차 평가에서 제외된 14개 기업 중 주채권은행이 필요하다고 판단하는 업체다. 그러나 선제적 구조조정을 한다는 명분으로 퇴출 기업을 양산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구조조정의 칼자루를 누가 쥐고 있는지를 분명히 하자는 주문도 있다. 겉으로는 은행이 주도하는 것 같지만 실상은 금융 당국이 모든 걸 좌지우지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책임소재가 불분명해질 소지가 있다는 것이다. 권순우 삼성경제연구소 거시경제실장은 “현재의 구조조정은 선제적 워크아웃의 성격이 짙기 때문에 채권단 위주의 구조조정이 돼야 한다”며 “정부는 이를 지원하는 역할에 머물러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유병규 현대경제연구원 경제연구본부장은 “굳이 퇴출 대상 기업(D등급)의 명단까지 발표했어야 하는지 의문”이라며 “시장에서 자연스럽게 퇴출되도록 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기업 자구노력이 전제=은행들이 기업을 지원하는 데는 분명한 전제조건이 따라다닌다. 자구노력이 그것이다. 보통이라면 받지 못할 혜택을 받았으니 기업도 그에 상응하는 성의 표시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워크아웃 대상 기업들은 곧 자산매각·사업조정과 같은 자구계획을 마련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와 관련, 일부 기업의 도덕적 해이를 지적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워크아웃 대상에 포함된 건설사 가운데 롯데기공과 삼호는 롯데와 대림의 계열사다. 어려워지면 그룹 차원에서 먼저 손을 썼어야 하는데도 이번에 워크아웃 대상에 포함됐다.

김준현·김영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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