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위석칼럼>창조적 大權파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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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진도(珍島)는 한반도의 서남해에 떨어져 있는 섬에 불과하지만 진도다시래기굿은 한국 문화의 세계관 가운데 가장 작지 아니한 한 가지를 대표적으로 사고(思考)하고 있다.슬픈 일의 한 구석에서는 반드시 기쁜 일이 태어나고 있다고 보는 낙관(樂觀)이 그것이다.이 굿에서는 초상집 한 구석에서 떠돌이 봉사 마누라가 아기를 낳는 장면으로써 이 찌렁찌렁한 선언을 전혀 아무일도 아니란듯 조용하게 내민다.

J A 슘페터는'창조적 파괴'라는 말로 자본주의의 진화를 설명했다.이 말은 진도다시래기의 테마와 일치한다.슘페터는 경제공황을 새로운 발전을 위한 이노베이션,즉 창조를 일으키는데 꼭 필요한 파괴국면으로 보았다.파괴 없이는 창조가 없다.1997년,한국은 지금 경제불황보다 더 심각한'정치공황'에 빠져 있다.

김영삼(金泳三)대통령은 개혁을 대통령 임기중 자신의 상표로 삼아 왔다.金대통령이 말하는 개혁은 기대하는 결과만 놓고 보면 슘페터의 이노베이션과 유사하다.자신이 극심한 정치공황의 중심부가 돼 있는데도 지난주 금요일 대국민 담화의 제목을'정치개혁에 관해 국민에게 드리는 말씀'이라고 붙일만큼'개혁'이란 단어에 강박(强迫)돼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개혁에 철저하게 실패했다.그는 청와대 점심상에 내놓는 칼국수발만으로 개혁의 창조적 내지 건설적 측면을 감당할 힘이 있는 것으로 착각했던 것 같다.아직도 그가 그렇게 믿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은 금요일의 담화에서도'임기중 단 한푼의 돈도 기업으로부터 받지 않았음'을 강조한 대목이었다.김영삼 개혁이 실패한 이유는 국수가락이 창조를 담당하기에 너무 약하다는 데 있지는 않았다.창조에 앞서 철저한 파괴를 선행시키지 않았다는 데 있었다.

이른바 사정(司正)을 창조를 위한 파괴절차였다고 견강부회(牽强附會)하면 곤란하다.金대통령의 사정은 그저 숙청에 지나지 않았다.대통령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이었을 뿐이다.낡은 군사정권 세력을 숙청하는 것에는'사정'내지'역사 바로 세우기'란 이름을 붙였다.거기에 그치지 않고 새로 싹을 틔우려는 자본가 출신 정치세력도 철저히 봉쇄했다.부산 초원복집 사건의 범인과 피해자를 완전히 뒤바꾸어 처리한 다음 자기와 대선(大選)에서 경쟁했던 정주영(鄭周永)씨의 현대그룹에 대해서는 국책.민영은행 할 것 없이 오랫동안 대출을 막았다.

지금 와서 개혁의'창조적 파괴'라는 속고갱이 가운데 창조부분을 아직도 그가 맡겠다는 것은 그에게 남아 있는 석양(夕陽)의 길이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드러난 능력을 보아서도 불가능해 보인다.그러나 파괴부분에 대해서는 그가 맡아 공(功)을 이룰 수 있는 몫이 엄청나게 크다.시기도 성숙했다고 볼 것이 안그래도 정치공황이 극에 접근해 있어 파괴에 대한 자생적(自生的) 모멘텀마저 크게 불어나고 있으니까 말이다.

파괴해야 할 핵심은 다른 것 아닌 대통령의 권한 그것이다.'대권(大權)'이니'통치권(統治權)'이니 하는 이름아래 법을 초월하거나 위반해 선한 일이든 악한 일이든 무엇이나 할 수 있는 절대권력을 조목 조목 법으로 줄이고 묶음으로써 파괴해야 한다.이것이 개혁 자체고 개혁을 위한 핵심 전략이다.全.盧 두 전직 대통령이 감옥에 간 것도,한보사건,아들 구속,92대선자금 고통등이 모두 고삐 없는 절대'대권' 탓이다.돈 안드는 대선이란 이번 담화의 정치개혁도,경제 살리기를 위한 규제 혁파도'대권의 파괴'없이는 불가능하다.

'대권'파괴의 자생적 모멘텀으로서는 김종필(金鍾泌)씨의 내각제 개헌,이홍구(李洪九)씨의 대통령 권력 분할,이회창(李會昌)씨의'법대로'를 들 수 있다.고건(高建)총리의 규제 혁파,강경식(姜慶植)부총리의 금융실명제 보완도 창조적 파괴의 일환이다.구 정권의 가시물(可視物) 부실(不實)의 실제요 상징인 한강의 당산철교.양화대교 두 다리를 철거하고 있는 조순(趙淳) 서울시장의 파괴력도 진도다시래기 같은 낙관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강위석 논설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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