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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건 前 미국 대통령 타계] 美 경제·리더십 되살린 '낙관론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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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일 세상을 떠난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과 낸시 여사가 1992년 결혼 40주년 기념식에서 촬영한 사진. 레이건은 81~89년 대통령 재임 시절 미.소 냉전 종식에 앞장섰고 특유의 낙천적인 성품으로 미국민의 자신감을 회복시켰다. 그는 퇴임하는 대통령으로는 가장 높은 인기도를 기록하기도 했다. 93세. [워싱턴 AP=연합]

"미국의 영원한 낙관론자가 세상을 떴다."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이 5일 타계하자 MSNBC는 "그는 1970년대 워터게이트 사건과 오일쇼크로 자신감을 상실하고 우울증에 시달리던 미국을 구해낸 유쾌한 십자군이었다"며 애도했다.

라디오 스포츠 캐스터, 할리우드 B급 영화배우, TV 탤런트, 제너럴 일렉트릭의 대변인을 거쳐 캘리포니아 주지사에 이어 제40대 미국 대통령에 오른 레이건의 인생 역정엔 '고난과 인내'보다 생에 대한 특유의 낙관론이 돋보인다.

레이건은 1911년 2월 6일 일리노이주의 '촌동네' 탬피코에서 구두 세일즈맨 존 레이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일찌감치 정치에 관심이 있어 딕슨 고교시절 학생회장을 했고 일리노이주 유레카 칼리지(경제학과)를 다닐 때는 학생 상원의장을 했다. 32년 대학을 졸업한 뒤 배우의 길을 걸으면서 37년부터 64년까지 59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그러나 당시 험프리 보가트 같은 스타를 제칠 만큼은 안 됐다. B급 배우에 머물렀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레이건은 '정치'라는 또 다른 가능성을 발견했다. 47~52년, 59~60년 두차례에 걸쳐 영화배우 조합장으로 맹활약한 뒤 67년 캘리포니아 주지사에 선출됐다. 주지사 시절 골칫덩이였던 주정부 적자 문제를 정부 고용, 복지.사회보장 지출 삭감으로 해결했고 이에 따라 임기 말 캘리포니아주 경제는 번영하게 됐다. 더 큰 꿈 대권(大權)을 위한 발판을 마련한 것이다.

그러나 76년 첫 도전은 60표 간발의 차로 실패했다. 80년 재도전한 그는 마침내 대통령이 됐다. 백악관에 입성한 레이건은 불황에 허덕이는 미국 경제에 감세를 핵심으로 하는 '레이거 노믹스'를 처방했다. 그 결과 레이건은 역대 미국 대통령 중 '일자리를 가장 많이 창출한 인물'로 기록됐다. 그의 재임시절 미국 5대 대도시 고용시장은 최고의 활황을 기록했다.

외교 분야에선 '악의 제국' 소련 밀어붙이기가 시작됐다. 전략방어구상 '스타워스'와 같은 군비 증강 프로젝트를 통해 압력을 넣는 한편 전략무기 감축을 유도하는 강온 양면 전략이었다. 마침내 87년 12월 소련과 군비 경쟁 해소의 새로운 시대를 열고 미하일 고르바초프 당시 서기장이 이끄는 모스크바를 개혁.개방으로 이끄는 데 성공했다.

소련과의 체제 대결에서 승기를 잡은 레이건은 리비아를 폭격함으로써 앞서 카터 대통령이 이란 인질 구출 실패로 잃었던 미국의 리더십을 되찾았다. 그러나 미국은 이로 인해 제3세계 국가들로부터 "군사 공격을 서슴지 않는 제국주의 국가"라는 비난을 받기 시작했다.

미국 정치계가 가장 평가하는 또 다른 업적은 레이건이 '오늘날 공화당의 정체성을 확립시킨 인물'이란 점이다. 이전 공화당엔 수십여개의 파당이 난립해 있었다. 이를 레이건이 ▶강력한 안보 ▶연방정부의 역할 최소화 ▶공권력 개입보다 시민들의 자주적 결정을 선호하는 '보수적 원칙' 을 일관되게 내세우면서 당을 하나로 묶었다.

워싱턴=강찬호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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