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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후 수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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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1993년 3월 8일, 프랑스를 대표하는 영화상인 세자르상 시상식장에서 최고 영예인 작품상 수상작으로 시릴 콜라르가 감독·주연한 영화 ‘사베지 나이트(Les Nuits Fauves)’가 호명됐다. 하지만 콜라르는 금빛 세자르상 트로피에 키스하지 못했다. 에이즈에 걸려 있던 콜라르는 시상식 3일 전 병원에서 사망했기 때문이었다.

12일(한국시간) 열린 2009 골든글로브상 시상식에서도 ‘다크 나이트’의 조커 역으로 명성을 떨친 히스 레저가 극영화 부문 남우조연상을 수상했지만 수상자의 모습은 볼 수 없었다. ‘브로크백 마운틴’에서 동성애자 연기로 2006년 오스카 남우조연상 후보에 오르는 등 나이답잖게 연기파 배우의 명성을 쌓아온 레저는 영화가 개봉되기 6개월 전인 지난해 1월, 29세의 나이로 자신의 아파트에서 시체로 발견됐다. 사인은 약물 과다 복용이었다.

골든글로브상의 결과에 따라 레저의 팬들은 ‘32년 만의 오스카 사후 수상’이라는 기대에 한껏 차 있다. 아카데미상의 80년 역사에서 사후에 연기상을 받은 인물은 1977년 ‘네트워크’로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피터 핀치 단 한 명뿐이다.

영원한 청춘의 우상 제임스 딘은 55년 사망한 뒤 이듬해엔 ‘에덴의 동쪽’으로, 57년엔 ‘자이언트’로 두 번이나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랐지만 모두 수상에는 실패했다. 스펜서 트레이시(68년 ‘초대받지 않은 손님’), 랄프 리처드슨(85년 ‘그레이스토크’), 마시모 트로이지(96년 ‘일 포스티노’) 등 일세를 풍미한 명배우들도 후보에 그쳤다. 그만치 생과 사의 벽은 높았다.

어떤 분야에서든 사후 수상이란 매우 감동적인 이벤트다. 불의의 사고사든, 예고된 죽음이든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자기 분야에서 열정을 불사른 위대한 장인에게 살아 남은 사람들이 바칠 수 있는 최고의 헌사이기도 하다. 물론 분야에 따라 경우가 다를 수 있다. 무공훈장이라면 생존한 수상자보다 사망한 수상자가 더 많은 게 당연할지도 모른다. 반면 노벨상은 이미 사망한 인물을 수상자로 결정하는 것을 원칙적으로 금지하고 있다. 감정의 개입 없이 오로지 업적으로만 엄격한 판단을 하기 위해서다.

오스카상도 지금까지는 ‘망자에게는 공로상, 산 배우에게는 연기상’이란 원칙에 비교적 충실해 왔다. 역대 최고의 악역 연기라는 평가를 얻었던 히스 레저는 원칙의 벽을 넘을 수 있을까. 다음 달 23일의 제81회 아카데미상 시상식 결과가 기대된다.

송원섭 JES 엔터테인먼트 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