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전지에 묻힌 53년 전 사진 주인공 확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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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충일인 6일 경기도 가평군 북면 화악2리 전사자 유해발굴 현장을 찾은 나영일씨(左)가 1951년 학도병으로 전사한 형의 영정을 들고 기자들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연합]

"어머니가 애타게 그리던 형님이 흙이 되어 돌아오다니…."

서울 신내동에 사는 나영일(59)씨는 현충일인 6일 경기도 가평군 북면 화악2리 육군 유해발굴 현장에서 거친 흙을 손에 잡고 목놓아 흐느꼈다.

육군 유해발굴팀이 가평군 북면 소법2리에서 발견해 공개한 20대 청년의 사진이 1951년 전사한 형 영옥(당시 21세.상병.사진)씨임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본지 6월 5일자 7면). 영옥씨의 또다른 동생 영환(72)씨와 옥자(64)씨, 그리고 조카 등 유족 13명은 유해 안치소에서 영정을 놓고 큰절을 올렸다.

영일씨의 큰아들 현철(31)씨는 신문에 난 사진이 큰아버지임을 단박에 알아보고 육군에 연락했다. 수려한 용모에 왼손의 손목시계, 주머니 속의 만년필 등이 평소 아버지가 "돌아가신 형님"이라며 고이 간직하고 있던 사진과 똑같았다.

이 사진은 영옥씨가 입대 직전 고등고시를 준비하면서 시험에 응시할 때 사용하려고 찍어두었던 것이다.

동생 영환씨는 "8남매 중 둘째인 형은 영리해 부모님이 각별히 좋아했다"며 과거를 회상했다. 가족들에 따르면 영옥씨는 순천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인 전남 벌교에서 등기소 서기로 근무하면서 고시를 준비했다.

좌.우익이 대립하던 시절 우익단체인 대한청년회의 훈련부 간부로 활동하다 혼자 부산으로 피란갔다.

이후 영옥씨는 부산에서 학도병으로 자원 입대했으며 51년 초 전투 중 다리가 부러져 부산 육군야전병원에 입원했다.

완쾌된 뒤 5사단으로 복귀했다. 그러나 이것이 마지막이었다. 전쟁이 끝난 뒤 가족들은 국방부에서 영옥씨가 실종됐다는 통지를 받았다. 해마다 현충일이면 가족들은 국립묘지 위령탑에 새겨져 있는 나상병의 이름을 어루만지며 먼 하늘을 바라보는 것이 고작이었다.

아들을 기다리던 어머니는 85년 숨을 거두면서 아들 영일씨에게 빛바랜 흑백사진을 유품으로 남겼다. 영일씨는 사진을 바탕으로 영정을 제작해 명절 제사 때마다 밥을 차려놓고 제사를 지내왔다.

육군 유해발굴팀의 진종록 중령은 "나영옥 상병은 국군 5사단 36연대 소속으로 중공군의 정월대공세가 시작되기 전날인 51년 2월 5일 가평군 화악산 전투에서 전사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영일씨는 "이제야 현충일이 아닌 진짜 형의 기일(忌日)을 알게 됐다"면서 "정부가 나라를 위해 희생한 사람들을 찾는 일에 좀더 적극성을 보였으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가족들은 오는 17일 유해발굴을 지원한 27사단 사령부 연병장에서 열리는 영결식에 참석해 국립묘지에 영면할 '나상병'을 배웅할 예정이다.

가평=민동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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