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우경화한 左派 블레어 총리 바람타고 르네상스 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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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냉전종식후 일반인들의 관심 밖으로 밀려났던 유럽 좌파정당들이 최근 국민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현재 유럽에선 좌파정당이 단독집권하고 있는 국가는 영국.포르투갈.그리스 3개국밖에 없다.그러나 지난 1일 영국총선에서 노동당이 압승을 거두자 선거를 앞두고 있는 프랑스.독일등의 좌파정당들이 일제히 기세를 올리고 나섰다.

25일 실시될 총선을 앞둔 프랑스 좌파연합은 이번이 정권장악의 호기라며 큰

기대를 걸고있다.

유럽정치의 바로미터라 할 수 있는 프랑스에서 만약 좌파연합이 승리한다면

내년 가을로 예정된 독일 총선에서도 좌파바람이 거세게 불어 유럽좌파의

부흥기가 도래할 전망이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모든 것이 불투명하다.

프랑스 사회당은 영국에서 분'장미'(좌파정당의 상징)바람이 프랑스에서도

불 것으로 기대하고 있지만 여론조사는 우파가 여전히 유리한 상황임을

보여주고 있다.

여기다 좌파의 공격에 대항해 우파에서 토니 블레어의'신노동당' 정강정책은

좌파노선의 변형이 아니라 대처리즘의 변형이라며 영국총선의 진정한

승자는 대처리즘이라고 반박하고 나와 좌파에 새로운 고민을 던져주고 있다.

실제로 좌파의 활기찬 도전에 직면한 각국의 우파들은 영국 노동당의

선거승리는 친(親)기업적 작은 정부를 지향하는 보수당의 자유주의

정책노선이라고 반박하고 있다.

때문에 노동당의 승리에 환호하는 겉모습과 달리 유럽 좌파정당들의 속내는

복잡하다.

블레어와 같이 바람을 일으킬 수 있는 뉴리더가 없다는 점은 차치하더라도

노동당의 혁명적 변신을 대륙쪽 좌파정당들로서는 쫓아가기 어렵다는데

근본적 어려움이 있다.

보수.노동당의 미국식 양당제가 정착돼 있는 영국에 비해 전통적으로

유럽대륙의 정치구도는 분화주의를 기본으로 해왔다.소수당의 난립은

정권창출을 위한 정당간 연립을 불가피하게 만든다.

수권정당을 추구하는 한 색깔을 분명히 하기가 구조적으로 어렵게 돼

있다.연립의 부담은 선명한 노선수정에도 걸림돌이 된다.

재집권을 위해 공산당과 제휴한 프랑스 사회당이 바로 그런 꼴이다.

세계화에 따른 국경없는 무한경쟁과 자유무역주의의 거센 물결 앞에서

사회당은 영국 노동당 식의 적극적 변신이 필요하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공산당에 발목이 잡혀 말을 못꺼내고 있다.

공산당의 잔존세력인 개혁공산당까지 연정에 끌어들여 집권한 이탈리아의

로마노 프로디 중도좌파정권도 비슷한 처지다.

프랑스 정치분석가인 제라르 그륀베르그의 표현대로 오늘날의 유럽

좌파주의는 색깔을 잃었다.

좌우의 구분은 유권자의 편의를 위해 존재할 뿐 실제 정책은 별개의 문제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80년대초 프랑스 사회당은 집권 2년만에 국유화 정책을

포기했다.좌파정당에 민영화는 더 이상 금기(禁忌)가 아니다.좌파가

단독집권하고 있는 영국이나 그리스는 민영화를 아예 강령에 포함시켰다.

연정을 이끌고 있는 빔 콕 네덜란드 총리(노동당)는 기민당이 추진해온

복지수당 삭감등 긴축정책을 그대로 밀고나가 영국에 버금가는 경제적

성공을 거두고 있다.

유럽 좌파정당들이'정체성 위기'에 직면하는 것은 당연하다.

펠리페 곤살레스 스페인 노동자사회당 당수(전총리)가 위원장으로 있는

사회주의 인터내셔널 개혁위원회는“시장경제를 인정하고 보호한다는 것이

의료와 교육 문제까지 시장에 맡겨야 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고

최근 보고서에서 지적했다.

경제정책의 차별화는 물건너

갔고,교육.의료.환경.지방분권.이민.여권(女權)등 사회정책 분야에서 그나마

정체성을 모색하고 있는 형편인 것이다.

블레어 영국총리는“정당은'모뉴먼트'(기념물)가

아니라'무브먼트'(운동)다”는 말을 즐겨 사용한다.시대적 변화에 걸맞은

현실적 실용주의가 중요한 것이지 좌우의 색깔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는

얘기다.노동당의 집권은 좌파정당의 탈색화와 함께 이념적

균형주의.중도주의 시대의 도래를 예고하고 있다.

21세기로 가는 길목에서 유럽의 좌파정당들은 중산층을 끌어안을 수

있으면서 여전히 진보적 지식인의 준거틀로 남아있는 좌파주의를 포용할

수 있는 메시지를 창출하고 전파해야 하는 힘겨운 과제에 봉착해 있다.

파리=배명복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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