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문창극 칼럼

폭력의 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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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한쪽은 울고 다른 한쪽은 웃었다. 이번 국회를 끝내면서다. 야당은 박수를 치며 이겼다고 좋아했고, 여당은 오만상을 찌푸리며 졌다고 분개했다. 정말 그럴까? 이상한 일이다.

내가 보기에는 한나라당이 이기고, 민주당이 패배했는데 왜 거꾸로 야단일까? 이기고도 졌다고 울고, 지고도 이겼다고 기뻐하다니…. 아마도 보는 눈이 달라서일 게다.

한나라당이 이번에 양보를 하지 않고 밀어 붙였다면 어떻게 됐을까. 상당수가 큰 부상을 입었을 것이고 국회는 장기간 마비됐을 것이다. 야당은 이번 봄을 겨냥하여 장외로 나갈 준비를 했을 것이다. 국제적 망신살은 말할 것도 없다. 그걸 막은 것이 한나라당이다. 그런데 민주당은 무엇을 이겼다고 하는가. 폭력의 승리를 자축하는 것인가? 법안 통과라는 단기적 목표만을 보면 그럴 수 있다. 속도전을 하는 여당은 통과를 못 시켰으니 진 것이고, 야당은 폭력을 동원해서라도 법안 통과를 막았으니 승리했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러나 조금만 긴 눈으로 보면 이번 일은 다수의 여당이 양보함으로써 파국을 막은 것이다. 폭력의 상처 속에서 그나마 의회주의가 지켜진 것이다. 한나라당은 이 점을 국민들에게 부각시켜야 했다. 그것이 세일즈 포인트였다. 그런데 여당 내에서 오히려 패배했다고 파벌 싸움만 하니 보기에 딱하다.

승패 여부는 그 목표에 달려 있다. 개인 차원에서 볼 때도 그렇다. 매일매일 지는 삶을 사는 것 같은데 언제나 즐거워하는 사람이 있다. 반면 아등바등 매번 이기면서 살았는데도 인생 전체를 보면 결국은 실패한 사람도 있다. 종교인들이 이 세상에서 지는 삶을 살라고 주장하는 이유는 목표가 이 세상에 있지 않고 영원한 세계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목표가 단순히 법안 통과냐, 아니면 그것을 넘어 민주 절차의 존중이냐에 따라 승패의 관점이 달라진다.

우리의 목표는 선진국이다. 그러자면 경제뿐 아니라 정치, 문화, 관습 등 모든 면에서 선진국이 되어야 한다. 항아리는 그 주둥이 높이가 같아야 물을 가득 채울 수 있다. 한쪽 주둥이는 높고 다른쪽 높이는 그 절반이라면 물은 절반밖에 차지 않는다. 선진국이라는 것도 마찬가지다. 정치, 경제, 문화, 관습 모두 골고루 높아야 비로소 선진국 용량에 도달하는 것이다. 경제만 살아난다고 선진국이 되는 것은 아니다. 미네르바 한마디에 나라가 흔들릴 정도로 지적 풍토가 천박하고, 국회는 폭력으로 지새운다면 경제가 아무리 되살아난다 해도 결코 선진국에 진입할 수 없다. 가장 낮은 부분에 의해 나라의 발목이 잡혀 그 수준에 머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보다 높은 목적과 넓은 시야를 가져야 한다. 선진국의 핵심은 법치다. 그 법을 만드는 의회가 폭력에 지배 당한다면 누구에게 법치를 요구할 수 있겠는가. 법치의 의회 없이 법치의 나라를 만들 수 없다. 우리는 지난 어두운 역사 때문에 소수의 저항에 관대했다. 더 큰 폭력에 맞서기 위해 의회 안의 폭력에도 눈을 감았다. 그러나 이제는 달라졌다. 무슨 명분이라도 폭력은 안 된다. 민주주의의 근본에 관한 일이기 때문이다. 국회부터 다수결에 대해 분명한 규칙을 세워야 한다. 민주주의는 다수의 결정을 따르면서 소수의 권리도 존중한다. 미 상원에서도 소수의 권리를 위해 필리버스터라는 제도가 있다. 법안을 표결하지 못하도록 발언을 질질 끄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소수 권리가 무제한 용인되는 것은 아니다. 100명 중 60명이 찬성하면 필리버스터는 중단되어야 한다. 우리 국회도 누구도 깰 수 없는 의사규칙을 만들어야 한다. 야당은 폭력에 대해 사과하고 새 규칙 제정에 협조해야 한다.

다수결의 민주주의가 힘을 갖는 이유는 소수도 존중하기 때문이다. 그런 마음은 어디서 나올까. 그것은 소통이다. 대화를 통해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는 것이다. 영원한 여당, 만년 야당이란 없기 때문이다. 이 나라의 가장 큰 문제는 서로 편을 갈라 상대에 대한 적대감과 미움만 확대 재생산하는 데 있다. 미네르바가 그렇고 방송법이 그렇다. 이슈 자체의 옳고 그름보다 어느 편이냐가 더 중요하다. 나라는 점점 더 깊은 구덩이로 빠져 들어가는 느낌이다. 의회의 위기는 이런 사회의 위기와 맥을 같이한다. 우리는 화해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함께 살아가야 할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서로의 마음이 열리지 않는 한 폭력의 병은 치유될 수 없다. 따라서 이 문제는 국회 문제인 동시에 우리 전체의 문제다.

국회가 ‘법치의 의회’로 바뀌는 모습을 한번 상상해 보라. 나라 전체의 격이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되는 것이다. 돈 드는 일도 아니다. 우리가 마음 먹기에 달린 문제다.

문창극 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