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글 쓰려고 법전 옆에 두는 김훈 작가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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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호 35면

민주국가를 지배하는 것은 사람이 아닌 법이다. 우리나라에는 현재 1개의 ‘헌법’과 1157개의 법률, 1395개의 대통령령, 1150개의 총리령과 부령, 기타 291개의 규칙이 존재한다. 모두 3994개의 법령이 공기나 물처럼 국민의 일상생활을 지배한다. 이들 법령을 지금보다 더 이해하고, 친숙하게 느낄수록 삶의 질이 높아지는 것은 당연지사다.

문장에 엄격하기로 유명한 소설가 김훈 선생은 좋은 글을 쓰기 위해 늘 법전을 가까이 두고 법률 문장을 자주 읽는다고 한다. 프랑스 작가 스탕달이 문장 연습을 위해 매일 프랑스 민법전(Code Civil)을 탐독했다는 것도 널리 알려져 있다. 왜 그럴까. 법전은 쉽고 간결한 문장으로 규범을 명확하게 선언한다. 학생들이 어릴 때부터 법전을 가까이한다면 논리적 사고 훈련과 문장력 향상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모든 국민이 집집마다 법전을 두고 읽는다면 법치주의의 정착과 법률문화 발전에 보탬이 될 것이다.

‘대한민국 헌법’은 전문(前文)과 10장(章) 130조의 본문, 그리고 부칙으로 구성돼 있다. 헌법은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국가의 근본과 지향점을 종합 정리한 것이다. 이를 당대 최고 수준의 간결하고 아름다운 문장으로 요약한 정화(精華)라고 할 수 있다. 가장 빨리 대한민국을 이해하려면 시간을 내 헌법을 읽어 보라고 권하고 싶다. 헌법을 읽다 보면 그 정신과 내용, 유려한 문장에 깊은 감동을 느끼게 될 것이다.

헌법 전문을 보자.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을 계승하고…’로 시작한다. 이어 ‘…정의·인도(人道)와 동포애로써…모든 사회적 폐습과 불의를 타파하며…각인(各人)의 기회를 균등히 하고…자유와 권리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를 완수하게 하여…우리들과 우리들의 자손의 안전과 자유와 행복을 영원히 확보할 것을 다짐한다’고 선언한다.

본문에도 주옥같은 문장이 즐비하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등등. 우리의 삶을 든든하게 지켜 주는 내용이다.

법령 중에서 국회가 만드는 ‘법률’은 국민 생활을 직접 규율한다. 이 때문에 법률은 배운 사람이건, 못 배운 사람이건 누구나 쉽게 찾아볼 수 있고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지난해 국민참여재판의 배심원으로 참여한 사람들이 큰 애로사항으로 ‘법률 용어 이해의 어려움’을 꼽았다.

법률의 이름이 너무 길거나 난삽하고 용어나 내용이 어려운 데서 기인한다. 실제로 국내 법률 중에서 가장 긴 이름을 가진 것은 ‘대한민국과아메리카합중국간의상호방위조약제4조에의한시설과구역및대한민국에있어서의합중국군대의지위에관한협정의시행에따른국가및지방자치단체의재산의관리와처분에관한법률’로 모두 83자다. 제대로 읽기는커녕 보기만 해도 가슴이 답답하다. 놀라운 것은 이 법이 제정된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오히려 민법·형법·상법·건축법·사면법 등 간단명료한 이름의 법들은 대부분 오래전에 만들어졌다.

한글 전용으로 인한 문제도 있다. 법전에 ‘장사등에관한법률’이 있기에 어떤 내용인가 찾아보니 매장·화장·수목장 등 장사(葬事)의 방법과 장사시설의 설치에 관한 것이었다. 처음 생각한 장사(商業)와는 무관한 법이었다.

인터넷을 검색하다가 ‘조지하거나’라는 형법 용어의 뜻을 가르쳐 달라는 질문을 보고 크게 웃은 적이 있다. 형법 제136조 공무집행방해죄를 보면 ‘공무원에 대하여 그 직무상의 행위를 강요 또는 阻止하거나 그 직을 사퇴하게 할 목적으로 폭행 또는 협박한 자도 전항의 형과 같다’고 돼 있다. 여기서 ‘阻止(조지)’라는 단어의 뜻을 몰랐던 모양이다. 모를 수밖에. 이는 ‘저지(沮止)’라는 단어의 잘못이다. 형법을 제정할 때 한자어를 잘못 사용한 것이 지금까지 고쳐지지 않아 한 네티즌의 애를 먹인 것이다.

이처럼 긴 제목에 어려운 법률 용어들을 조속히 고쳤으면 한다. 또 한글을 전용하되 애매한 경우에는 한자를 병기해야 의미의 혼란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다행히도 최근 ‘먹는 물 관리법’ ‘디자인 보호법’ 등 좋은 이름에, 쉽고 아름다운 문장으로 꾸민 법률이 늘어나는 추세다. 국회와 정부가 국어학계와 협력해 ‘알기 쉬운 법률 만들기’에 더욱 힘써 주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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