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호세상보기>급진주의의 종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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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한국 사람들의 요즘 심경은 세월을 거꾸로 사는 것 같다.전두환(全斗煥)재평가설,노태우(盧泰愚) 동정설이 나오는 반면 그 인기 좋던 YS에 대해선 복제 금기(禁忌)설이 등장한다.어쩌다 이렇게 사람들의 마음이 뒤틀리게 됐는지 영문을 모르겠다고 이구동성으로 한탄한다.그러면서도 과거회귀는 안된다고 한다.결국 존경받는 지도자가 없다는 울분이 한국인의 마음 속에 착잡한 정서로 자리잡아 가는 것 같다.

국민을 실망시킨 대통령들의 성향을 분석해보면 이들은 모두 급진주의자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그렇다면 국민의 울분은 혹시 급진주의에 대한 실망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한번 분석해볼 필요가 있다.

'서울의 봄'을 짓밟은 전두환 전대통령은 폭력과 탄압의 정치를 폈다.후일 내란과 반란의 수괴(首魁)로 단죄된 그는 문민정부의 출범을 12년간이나 지연시켰다.민주적 질서로의 회귀가 역사적 순리인데도 그는 이를 거역했다.그는 총포를 동원,국권을 장악한 급진행동주의자였다.

그는 말끝마다 사회정의를 부르짖었으나 그의 시대처럼 민주이념 및 야당과 언론이 탄압받은 적도 없었다.입을 열기만 하면 공직자의 청렴도를 높여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자신은 막대한 뇌물을 거뒀다.대표를 자처하는 소수가 다수를 수탈하는 후진정치의 전형을 그의 시대에서 본다.

그의 뒤를 이은 노태우 전대통령은 부패의 정치를 폈다.대통령으로 당선되기가 무섭게 통치자금이라는 이름의 뇌물을 거둬들였다.대통령이 된 후 누구한테도 손을 내밀지 않았다는 그는 4천억원이 넘는 사상 초유의 비자금을 마련했다.그에게는'정치가가 무엇을 말하든 그것은 돈이다'라는 야유가 잘 어울린다고 한다.그는 전임자의 길을 답습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올바른 정치의 당위를 저버린 비뚤어진 급진주의자였다.

문민시대를 연 김영삼(金泳三) 대통령은 2명의 전직 대통령을 처벌하고 과감한 개혁정치를 폈다.한국병을 치유한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는 급진적 개혁주의자의 길을 걸었다.오죽하면 황제적 문민 대통령이라는 말까지 나왔을까. 그는 어느 누구로부터도 돈 한푼 받지 않는다고 공언했고 또 그것을 실천에 옮겼다.그러나 그의 비서와 아들과 측근은 거액의 떡값과 뇌물을 챙겼거나 챙긴 혐의를 받고 있다.아들과 측근이 발호한 정치는 봉건정치에 불과하다는 비판도 듣는다.그러니'나 혼자만의 청렴'이 무슨 큰 뜻이 있겠는가.대통령 자신도 이미 안전지대로 대피한 잉여 정치자금의 인지(認知)여부에 관한 의혹을 사고 있다.결과적으로 그는 인기와 기대를 배반한 정치를 폈다.

진보는 바람직한 방향으로 변화가 이뤄질 때 그 의미가 있다.그런데 진보에 속도를 더하겠다는 급진이 오히려 바람직하지 못한 변화를 초래하면 그 누가 급진주의자에게 실망하지 않겠는가.변화가 반드시 진보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역설의 진리가 장탄식과 함께 나온다.

그래서 오늘에 얻는 교훈은 우리 나라를 천국으로 만들겠다는 사람은 일단 경계할 수밖에 없다는 것,바로 그것이다.앞으로 8년 동안에 대선과 총선이 교대로 모두 네번 실시된다.너도 나도 대선도전을 선언한 제룡(諸龍)들이여,급진주의에 조종(弔鐘)을 울려라.(마음은 썰렁하고,결론은 씁쓸하구나!) ( 김성호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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